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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Jan 21. 2019

경제학으로 이겨낸 사랑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보고

25년 만에 100% 아시안 캐스팅으로 헐리우드를 휩쓸고, 에릭남이 무료 상영회를 진행해 화제가 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보았다. 베스트셀러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라 스토리도 탄탄하고, 영상이나 음악적 요소도 탁월해서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신데렐라 느낌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에다가, 한국적인 기승전결이 완벽해서 어디선가 봤을 법한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헐리우드 영화이지만 한국 드라마 같은 감성이 풍긴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항상 그러했듯, 영화의 내용이나 작품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속에서 기억에 남는 두 커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우리의 연애가 사랑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다양한 관계의 연인들과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 커플인 닉(헨리 골딩 분) & 레이첼(콘스탄스 우 분)과 마이클(피에르 팡 분) & 아스트리드(젬마 찬 분) 커플이다. 두 커플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고 하면, 전형적인 '상류층 + 서민'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물론 레이첼은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재원이고, 마이클 역시 나름 성공한 IT 기업의 사장이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 싱가포르의 왕족으로 등장하는 '영' 가문의 입장에서는 그저 서민층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나름 자수성가한 전문직 일반인이 삼성家로 들어간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닉의 배려와 레이첼의 고민이 일궈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보면 레이첼과 마이클은 '영' 가문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며 의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런 장면이 딱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의 공통분모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에 필요한 핵심 열쇠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딱 이것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서민 출신이라는 점 빼고, 레이첼과 마이클은 모두 다르다. 자격지심이나 편견에 대해 정면 돌파하려고 시도하는 레이첼에 비하여, 마이클은 그러지 못한다. 물론 원작인 책에서는 마이클의 노력과 고충이 등장하기는 한다고 하지만, 영화로 한정 지어 보면 레이첼에 비해 노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레이철은 끊임없이 현실을 파악하고, 그 상황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마치 경제학자로써 본인의 상황을 계량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본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인지하고, 각자에 알맞은 해결책을 마련한다. 자신을 해코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으로, 가문에서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예비 시어머니에게는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결론을 한정 지으며 주도권을 가져간다. 괜히 레이첼이 영화 속에서 게임이론에 대한 전문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클의 보모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아스트리드가 마음 아프다.


이에 비해 마이클은 아스트리드의 배려 속에서 본인이 가진 자격지심을 표현만 한다. 남편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 쇼핑한 물건을 숨겨두는 아스트리드의 배려조차 고마움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바람을 피운 사실을 들켰을 때에도, 본인보다는 가문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냐고 징징거리는 그의 태도는 한심할 정도이다.


혹자는 이러한 마이클의 모습을 옹호할 수도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경제적 능력이 뛰어날 것을 무의식적으로 강요(?)되는 측면이 있는데, 모든 걸 다 가진 아스트리드 측에서 조금 더 배려하고 신경 써줬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그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이 영화를 보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나를 포함해서) 일반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은 간단하다. 아스트리드의 배려는 극 중에 등장하는 닉의 배려, 그 이상이다. 그럼에도 바깥에서만 불행의 원인을 찾는 것은 마이클의 문제이다.




자존감이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바깥에서 문제를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만 보더라도 아스트리드가 그렇게 노력을 해도 마이클의 마음은 나아지지 않는다. 자격지심으로 인해 이미 꼬여버린 마이클의 눈에는 배려마저도 일종의 농락이나 위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변을 둘러보며 비교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한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누구나 자존감이 무너지고 열패감과 자격지심에 휩싸여 모든 걸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이클이 아닌 레이첼처럼 살아가려면, 그래서 중요한 가치나 누군가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이켜 보면,
자신의 비교우위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개념은 결국 기회비용을 고려하자는 말이다. 두 나라가 무역을 할 때 비록 한 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절대 우위를 지니고 있더라도,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교역을 하는 것이 윈-윈이라는 것이다. <맨큐의 경제학>에서는 타이거 우즈가 자기 집 잔디를 깎지 않는 것을 예시로 설명한다. 타이거 우즈가 골프도 잘 치고 화단도 잘 가꾸는 사람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골프에 올인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뭐 꼭 이렇게 수치화할 필요는 없겠지만 (출처: KDI경제정보센터)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도 그러하다. 주변에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외모까지 준수하고, 집안까지 화려한 그런 넘사벽의 사람들이 몇몇 존재한다. 그런 엄친아, 엄친딸들을 친구로 두고 있으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그리고 심한 경우 그게 마이클처럼 자격지심과 열패감으로 흐르고,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필요한 것은 좌절이 아니라 고민이다.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비교우위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인간관계이다 보니 경제학에서 설명하는 교역처럼 무조건적인 기브 앤 테이크로 상정하면 안 될 것이지만, 그래도 혼자서 고민해볼 필요성은 있다. 그러다 보면 그들에 비해 우리 같은 일반적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교우위를 이내 찾을 수 있게 된다. 단적이고 쉬운 예를 들자면 부자일 경우에는 금전적 이해관계없이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상대방이 왜 외적인 기준으로 열위에 있는 자신을 인격체로 대우해주며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비교우위에 대해 고민하면서 스스로도 자격지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 역시 한때는 자존감이 거의 바닥에 붙어 있던 사람이었다. 외모를 가지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고, 학벌이나 성적을 가지고도 찌질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연봉이나 잔고, 미래 계획 등을 가지고 쭈그러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자존감을 박살 내면서 주저앉지는 않고 있다. 자격지심만 쌓아 놓고 부정적인 표현만 하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 시간을 쓰기에 인생은 너무나도 짧은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비교우위는 무엇인지, 이를 파악함으로써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 친구들은 고맙게도 술자리에서 틈틈이 나의 비교우위에 대해 말해주곤 한다. 나의 고민의 결과물 이외에 내가 친구들에게 들은 나의 비교 우위는 다음과 같다. 내가 글을 쓰기 때문, 손재주가 많기 때문, 평범하거나 똑같지 않기 때문, 나로부터 창의적인 영감을 받기 때문,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 부담이 없기 때문, 언제 불러도 그 자리에 있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백한 녹차처럼 사회의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서, 이런 코멘트를 해줄 수 있는 잘난 친구가 있다는 것 또한 고마운 일이다. 


모든 면에서 수많은 엄친아와 엄친딸들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달달한 소리부터 쌉싸름한 소리들까지 모조리 취합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친구나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또한, 레이첼이 되길 바라며.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3104988/
스틸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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