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츤데레 Jul 09. 2019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하고 싶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의 일부이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저 시를 읽었고, 상상 그 이상으로 울림이 컸다. 그래서인지, 나도 윤동주 시인처럼 살고 싶었다. 부끄러움을 자각하면서 행동하고, 상대에게 떳떳한 것 그 이상으로 스스로 떳떳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인생의 40% 정도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재 느끼는 감정은, 내가 그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주변에 상처를 준 적은 있지만, 적어도 난도질해본 기억은 없다. 실수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사과를 했고 반성했다.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오히려 나를 안쓰러워할 만큼 자책하면서 말이다.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매번 드는 문장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내가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받을 상처를 최소화한다는 핑계로, 내가 받을 아픔이 겁난다는 명목으로 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이어왔다. 한 마디의 문장으로 부서질 수 있는 관계는 내가 미리 망가뜨렸고, 상대가 힘들어할 때에는 내가 가해자가 되었다. 잠재적인 리스크를 헷지한다는 표현을 써왔지만, 나는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 손에 대신 더러운 무언가를 묻히는 거라고 합리화했지만, 이제는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흔적을 부정한다면, 현재의 나조차 존재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부끄러운 과정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준 파편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앞으로 조금은 나아지고 싶기 때문이지만, 그 방향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늘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는 광의에서의 방향성은 가지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 길은 하나의 인간에게 너무도 넓은 것이라고 느껴진다. 한 살씩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가 더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기 때문인 탓도 있다.


부끄럽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당하게 하고 싶은 행동을 하고 이에 책임을 지는 것일지, 혹은 조심스레 리스크를 헷지하는 것일지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다. 다만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이 확고한 의지와 섬세한 배려, 그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어딘가'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물론 앞으로 남은 삶을 살면서도,

이는 나에게 주어진 과제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