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편해지는 일들
첫 번째 회사를 나오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2018년도 4월부터 99개의 글을 썼다. 초반에 글을 많이 썼던 이유는 아마도 무적(無籍)의 상태였기에 시간이 많은 것도 한몫했지만, 삶에 있어서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는 내 삶을 어떻게 살지,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지금은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엔 크나큰 무게로 다가오던 '서른'을 마주하게 될 마지막 20대의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되고도 두 해가 더 지났다. 고민에 고민을 더해 한 글자씩 써 내려가던 29살의 내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지만, 현재의 나는 조금은 더 평정심을 가진 사람이 됐다. 모 기업의 최종면접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금이나마 둥글어지고 단단해졌다.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도, 부모님과 친구 등 주변의 도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 변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주변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연두부 같은 멘탈이고 스트레스도 잘 받는 편이지만, 나름 지극히 예민했던 사람이 적절한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계기에 대해 글을 써보고자 한다.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느낀 실망감은 다양했다. 이해심이나 배려는 전무했고, 참을성도 없었다. 상대방의 약한 점을 지독히도 물고 약점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진절머리도 났었다. 그중 가장 압권은 본인보다 선배에게 '인건비' 운운하면서 모두가 보는 곳에서 난리 치던 팀장의 모습이었다. 물론 '부서 by 부서'라고 내가 있는 부서들이 좀 유별났던 것도 있지만, 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단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제일 정 떨어졌던 것은 일관성이 결여된 의사결정들이 하나하나 쌓여간다는 점이었다. 스스로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상사, 자신의 편이 아니면 지독하게 갈라치는 특정 인원들까지.. 사람에 대한 혐오감까지 생길 것 같았다. 물론 당시의 나는 너무 때가 덜 타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다들 이중잣대를 적용한다고 해서 그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괴로웠고, 답답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내진 않는다. 종종 울컥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삼키는 법을 배웠다. '내로남불은 인간의 본성이고, 보편성에 벗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라고 생각하고 넘길 뿐이다. 그런 생각이 습관화되니 삶의 피로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누구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화장실에 가고 잠을 자듯 내로남불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하니, 상대가 할 말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약간의 초능력도 생겼다.
물론 이렇게 생각은 하지만, 스스로는 '내로남불'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기까지는 솔직히 힘들 것 같고, '나에게도 적당히 엄격하고 남에게도 적당히 관대하게' 딱 그 정도로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친할수록 말이 없는 편이고, 어색할수록 말이 많은 편이다. 처음 본 사람, 적당히 불편한 회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불쾌한 고요함을 못 견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친하지 않은 동료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괜한 날씨 이야기를 한다거나, 직장 상사와 밥을 먹을 때는 괜한 취미나 주말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불필요한 이야기가 늘 많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친한 사이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주로 했다. 친구들끼리에서 내 대화의 양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나의 고민이나 스트레스 등을 주된 소재로 올렸다. 내 위주로 대화를 했고, 일부는 그것이 굉장히 피곤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멈출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고, 나의 힘든 점들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며 풀고 싶다는 욕구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대화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하면 된다. 일적으로는 물론이고, 일 외적으로도 상대가 물어보는 것을 대답하면 된다. A라는 업무의 진행경과를 물어보면 일정을 기간별로 간단히 언급하면 되고, 밥을 먹을 때는 상대의 취미나 관심사와 관련하여 살짝 운을 띄워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질 때는 나도 침묵하면 된다. 시간은 금방 지나가기 때문이다.
친구들과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최대한 내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들어주려고 대놓고 자세를 취하는 것은 부담스럽기 마련이기 때문에, '대화 총량 보존의 법칙'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 말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오히려 사람들은 내 고민을 물어보고 들어주려고 한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나만의 말을 우선 줄이는 것. 그리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고, 상대가 말할 공간을 주는 것이 대화의 핵심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나에게 주어지는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점도 느끼는 중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런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조금씩 실수가 줄어가고 있다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든다.
나는 본질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집돌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사회적이고 활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오해가 피곤한 적도 있었지만, 이는 나에게 일종의 자신감으로도 작용할 때가 많았다. '성격 좋고 유쾌한 내가' 노력만 한다면, 어떤 관계에서도 쉽게 녹아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회사에서 그 자신감은 조금씩 금이 갔고, 두 번째 회사에서 산산조각 났다.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물어보는 나에게 한 선배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침에 제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마지막에 나온다거나(7:00~21:00), 아침밥을 사서 책상에 올려둔다거나, 회식에 따라가서 건배사를 준비한다거나...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욕지거리뿐이었다. 스스로도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세 번째 회사에서 생활하면서 조금은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노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애초에 결이 다른 사람끼리는 잘 어울릴 수 없고, 그럴 때 노력을 계속하면 할수록 힘만 든다는 점이었다. 내가 과거의 기억까지 움켜쥐며 힘들다고 고민했을 때마다 차분하게 그런 조언을 해주며 공감해주는 선배들이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 사람 이해하려고 하면 머리 다 빠진다. 그냥 하지 마, 불가능한 거니까.'라고 딱 잘라 말해줬던 선배 J의 말이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예전과 같이 '오만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관계는 있다는 점을 쿨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원래 나는 1부터 10까지 해도 안되면, 11부터 계속 이어갔다. 그렇지만 지금은 1부터 5 정도까지 해도 반응도 없는 사람은 그냥 포기한다. 그와 나는 인간적인 관계가 있는 게 아니고, 업무적 계약관계만 존재하기 때문에 일적인 부분 바깥은 과감히 손절하는 것이다. 매몰비용을 고려해서 손절이라고 표현했지만, 내 삶의 질 차원에서는 익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익절을 몇 번 거치다 보니 나도 조금은 단단하고, 나만의 스타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뿌듯하다.
뭔가 많이 성장한 것처럼 거창하게 긴 글을 썼지만, 나는 이 글을 몇 개월 전부터 수 없이 썼다 지웠다. 쓴 이유는 지금까지 사회생활하며 느낀 점들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바라보기 위함이고, 지운 이유는 아직도 위의 이야기가 완전히 체화되지 않은 주제에 자랑하고 싶어 하는 알량한 꼰대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글을 마무리 지은 것은 전자에 갈수록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글로써 내 생각을 정리하고 끊임없이 반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회사의 선배들로부터 양질의 도움을 당연한 듯 받았기에, 누군가 이 글을 보고 힘든 회사생활에 힘을 냈으면 하는 바람도 조금 더했다.
쓰고 나서 보니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너무 자조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기대를 낮춰야 실망도 덜 하는 법이라고 믿기에, 나는 저 세 가지 교훈을 오늘도 생각하며 다음 주를 준비하려고 한다.
커버 이미지 글 출처 : 박준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