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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May 21. 2018

딸바보에 대한 고찰

나는 딸바보는 되고 싶지 않다.

바야흐로 딸바보의 시대이다. 아들/딸로 나뉘는 2세에 대한 선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사를 보니 딸에 대한 선호도는 아들의 2배 정도 된다고 한다. (딸 66.2%, 아들 33.8%)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남아선호사상이 굉장히 짙었다. 공공연하게 아들이 태어나길 기도했고, 시주했고, 굿을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왜 다들 딸을 원할까?


많은 의견과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의견은 이렇게 수렴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에게 살갑게 공감하는 따스한 자식듸 모습은 주로 아들이 아닌 딸이기 때문이다. 아들인 나에게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들 놈 키워봐야 소용없다.”라고. 처음에는 서운했는데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다 보니 상당 부분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부모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며 챙겨주는 철든 모습은 대부분 딸이니깐.
 
그래서 그렇게들 딸을 원하고 딸바보가 되는 것 같다. 자기 자식이면 안그래도 이쁘다던데, 간절히 바라던 딸이 태어났으니 엄청나게 사랑스러울 것이다. (물론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미혼의 남자라 짐작일 뿐이지만..) 지금 봐도 이쁜 딸, 안그래도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는 내 자식, 그리고 앞으로 나중에도 (대부분의 아들보다 더) 나를 챙겨줄 존재이니 소중할 수 밖에 없다. 충분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바보가 될 만큼 사랑스러울 것이다.



나는 딸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혹여 나에게 딸이 생긴다면, 그냥 그녀의 아빠이자 친구가 되고 싶다. 내 딸이라고 무조건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고 보호해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 보다는 한 명의 여성으로 그녀를 인정하고 싶다. 딸이라는 존재가 ‘나의’ 자식이고, 내가 화초를 가꾸듯 보듬어줘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딸이 아들보다 살갑고 부모친화적일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녀일 뿐. 덜도 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라도 그렇게 믿고, 하나의 개체로써 그녀를 인정하고 존중해주고 싶다. 머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녀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다. 스스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응원하면서 말이다.
 
더욱이 딸바보 아빠의 자식으로 크기에 세상은 너무 잔인하다. 어린 그녀가 자라면서 겪을 고통들은 내가 겪은 것보다 배가되어 있을 것이다. 시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각박해질 것이며 경쟁은 격화되어 있을 것이다. 또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넘어가곤 했던 일들까지 그녀를 괴롭힐 수 있다. 시대가 진보해나간다고는 하지만, 그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 여자라는 이유로 집단의 꽃이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매번 하시는 말씀처럼, 인생은 고(苦)이다.
 



아들바보도 지향하지 않아요.


그래서 딸바보 대신 아내바보가 되고 싶다. 딸과 다르게 무차별적이고 맹목적인 관심을 쏟고 싶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친구를 제외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혈연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이유없이 좋아하고 아끼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중 피로 얽히지 않은 사람은 아내뿐이다. 그래서 조금은 비이성적이어 보일 수도 있지만 바보처럼 좋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머리로 생각하는 순간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 이해타산적인 사고가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지 않은 미지의 2세보다는 아내를 보고 결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딸바보, 아들바보를 떠나서 2세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가 엄마가 되는 것이 싫다. 엄마로써의 그녀도 당연히 아름답겠지만, 우리나라 문화에서 엄마가 되는 순간 포기해야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여성이자 교사였지만, 많은 걸 포기하면서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 내가 결혼하는 여자는 그렇게 하나의 단어로 규정되어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해왔다. <500일의 썸머>에서 주인공 썸머가 누군가의 여자친구라고 정의되기 보다는 ‘그냥 스스로 존재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쓰면서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 쓰고 발행을 누르는 데 까지 2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양한 이유와 논리들이 머릿속에서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다만 여기에 쓴 이유를 차치하고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버지인 것 같다. 그는 내가 아는 60년대 생 남성 중 가장 심각한 아내바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인 나도 좋아하시기는 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항상 어머니가 먼저이다.) 그를 보고 자란 세월들이기에 나름 그에 대한 근거로 위와 같은 논리들이 머릿속에 자리하게 된 것 같다.


외딴 인도 땅에서 모바일로 작성을 하다보니 비문도 많은 것 같고, 표현도 논리도 부드럽지 못한 것 같다. 6월이면 다시 한국이다. 그 때 다시 PC로 퇴고하면 조금 나아지겠지, 생각하고 있다. 수줍게 그리고 모처럼 발행 버튼을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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