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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Jul 11. 2018

어른이 됐다는 증거

관계에서 진심을 분리하는 방법

20살만 되면, 혹은 나이만 어느 정도 이상 먹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딱 몇 살이라고 정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경험을 축적할 시점이 되면 다들 알아서 어른스러워지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쉬운 게 아니었다.


법적인 성인이 되어 대학교를 다닐 때를 돌이켜봐도 내 주변에 어른은 없었다. 미성년자는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하던 모습의 어른이 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기와 후배들은 물론이고, 선배들 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교수님들도 몇 분을 빼고는 어른으로써 존경받는 이가 안 계셨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보다 더 심했다고 해야 말이 맞을 것이다. 대리나 과장, 차장, 부장 혹은 팀장 이상의 직급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KPI를 위시로 하는 인사 고과가 한 인간의 성숙함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꼰대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전통적 집단주의 행태를 견지한 어른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볼수록, 스스로의 어림을 숨기고자 헛된 권위에 기대어 센 척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갈수록 안타까워졌고, 퇴사할 무렵 즈음에는 그들이 측은했다.




우리가 존경할만한 사람, 그런 의미에서의 어른은 정말이지 찾기 힘들다. 마치 이데아와 같아서, 실존하나 싶기까지 한다. 끊임없는 인격도야와 나름의 수행과 단련 기간이 필요할 것이고, 어떻게 보면 타고난 인품이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가정교육도 한몫할 것이다. 말이 쉽지, 저렇게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길이다. 


그렇지만 범인인 우리도 살아가다가 문득 '나도 어른이 되었나 보다', 생각하고는 한다. 세상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사회적인 존재로 거듭날 때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표현이 좋아서 적응일 뿐, 격한 표현으로 하면 점차 세상이나 집단의 생리에 맞춰서 찌들어 가는 것이다. 순수한 모습이 좋고, 적응한 찌듦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그러한 일면들은 달콤 쌉싸름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존경할 만한 어른은커녕, 우리 사회의 문화에 100% 순응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어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비꼬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위의 둘은 동기 회식, 아래는 팀 회식 사진. 같은 회식이지만 다르다.
같은 회식이지만 너.무.나.도 다르다. 빈말의 함량 차이일 것이다.



나는 빈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저러한 적응에는 많은 순간이 존재하겠지만, 스스로 가장 힘들어하는 포인트는 바로 빈말이다. 밥 먹기 싫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빈말이라도 밥 먹자는 소리를 하지 않고, 술 마시기 싫은 사람에게는 술의 ㅅ자도 꺼내지 않는다. 반대로 지나가는 말로라도 커피나 밥 혹은 술 한 잔 하자고 했던 이들과는 꼭 자리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좋게 보려고 하고 포장을 많이 해준다면 순수함일 수 있지만, 역시나 피곤한 성격이다. 


몇 달 전 퇴사 무렵의 대화를 재구성해보면 아래와 같다. 호감형인 사람을 A, 그 반대를 B라고 해보면 대충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밥 먹자고 하고 차일피일 적당히 미루면서 피한다고 하던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성격상 못하면서도 안 한다. 쓰면서도 약간 피곤해지는데, 그 상황을 돌이켜 보니 한숨만 나온다.


#1

츤 : A님, 저 이제 다음 주부터 안 나와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A : 츤님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

츤 : 네, 그러죠 뭐. 언제 시간 되세요? 저는 언제 언제가 되고, 언제는 좀 어렵고......

A : 아 그러면 그 날로 해요. 또 연락할게요~ 


#2


츤 : B님, 저 이제 다음 주부터 안 나와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B : 츤님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

츤 : 밥은 요즘 좀 속이 안 좋아서요..

B : 커피라도 해~ 그러면! 

츤 : 요즘 건강 때문에 커피도 좀 줄이고 있어요 ㅠㅠ 평소에 잘 챙겨주신 걸로 충분히 감사했어요!

B : 그래요~ 수고해요 그럼.




물론 30년 정도 살아오면서 많이 늘었다. 

대학 시절에는 후배들한테도 '언제 한 번 밥 먹자!'라는 빈 말도 못 하였는데, 역시 이런 것도 노력하니 되긴 했다. 나름의 연기력으로 승화시키기도 했고, 은근히 눙치면서 넘기기도 했다. 가끔씩은 부모님의 생신을 옮겨가며 자리를 피하는 스킬 또한 얻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는 이 정도 하얀 거짓말은 필수라고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이렇게 조금씩 나도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이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렵다.


내가 빈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된 이유를 생각해봤다. 저런 식으로 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으로 시작해서 약간의 강박적인 요소가 작용한 듯했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것은 빈말이 나름은 윤활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에서는 과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중간적인 포지션이 중요한데, 빈말을 통해서 적절한 친분이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피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는 정도랄까. 그래서 빈말을 앞으로는 거짓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인사'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헤어질 때, 자주 안 보는(혹은 안 볼) 사람에게 "안녕"이나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는 대신에 

"나중에 밥 한 번 먹어요~"라고 하는 인사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어 본다. 

마치 영어 회화 교재에서 "How are you?" 다음엔 "I'm fine, and you?"라고 기계적으로 이어나가는 듯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휴, 밥 한 번 먹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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