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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Sep 10. 2018

미안하다와 고맙다

본질적으로 같은 말임을

일본인들은 '스미마셍'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지하철에서 발을 밟아도, 물을 엎질러도, 약속에 늦었을 때도 자주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너무도 고마울 때에도 저 표현을 쓴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에는 그 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 당시의 내가 생각하기에 '미안하다'와 '고맙다'는 반의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 느끼는 것은 조금 다르다. 요즘은 저 둘이 유의어를 넘어서 동의어라고까지 생각한다.


두 표현 모두 타인의 희생이나 배려를 전제로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조금 오버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 속에는 미안하다고 말하면 '잘못을 온전히 내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는 생각이 박혀있었다. 모든 관계에서 모든 잘못은 쌍방과실이기 마련이다. 비율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 쪽만 잘못해서 발생하는 갈등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잘못을 수용하고 사과하기 보다는 잘잘못을 따지기를 선호했다고도 할 수 있다. 


판사도 아닌 주제에 뭘 그리 따졌는지..


20대 초중반에 걸쳐 3년 정도 만났던 여자친구 K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커플이든 싸우기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조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내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 잘난 맛에 한껏 취해있었기에 그러지 못했다. K와의 관계가 워낙 소중했기에 나도 사과를 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나의 사과는 "미안해. 내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잘못했어. 그런데 너도 저러저러한 것들은 잘못했잖아. 그것도 인정해줘!" 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훨씬 미성숙했던 나였지만 3년이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K가 착한 덕이었다. 그녀는 나의 거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고, 시간이 갈수록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K의 일관적인 포용력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길들여졌던 것 같다. 다만 그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길들여진다'는 표현은 상호적인 것인데, 내가 너무 무지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노력으로 지속되던 관계는 권태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헤어질 당시에는 나도 지쳤기에 후련했던 면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남는 것은 미안함이었다. K에게 고마울수록 미안해지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나는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렸다. 2015년 4월에 그녀와 헤어졌는데, 내가 무너진 것은 그 해 여름이었다. 사과의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한심한 이야기다.




소를 잃었지만 나는 외양간을 고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고치려는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별 차이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 다음에도 지속적인 문제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문제를 이해시켜주면 노력은 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제가 생기고 내 잘못이 파악되면 바로 사과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사과라도 해서 급한 불을 끄고자 한 것이다. 효과가 있던 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도 꽤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가 미안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해서 인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 잘못'으로 인해 '상대가 희생했을 때' 쓰는 말이다. 


나는 사과를 할 때 나의 잘못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상대방의 마음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때에는 상대방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도 포괄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몰랐다. 머리로 알긴 했어도 습관이 덜 되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나의 사과는 충분히 진정성을 함의하지 못했다.


희생에 대한 고마움까지 담아야 진정성이 전달되니까요.


요즘 내가 잘못을 했을 때 드는 생각은 미안함보다도 고마움이다. 나라는 부족한 사람을 상대해준 타인의 희생을 더욱 느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니,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 사람의 고통이 느껴졌다. 나의 잠깐이 상대의 마음 한 켠에 깊은 상처를 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그러면서도 나를 품어준 상대가 고마웠다. 고마움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생각의 순환은 나에게 큰 자책감과 자괴감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고도 고마운 삶을 살고 있다. 솔직하다는 핑계 뒤에 숨어서, 내가 말하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혀서 소중한 이들에게 상처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직까지 챙겨주는 것이 고맙다. 미안해서 고맙고, 고마워서 미안한 그런 아이러니의 순환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미안하다'와 '고맙다'가 동의어라면, 후자만 사용하고 싶다. 항상 그러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목표가 커야 그 근처라도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글을 쓰면서 생각을 다진다. 새로운 고마움을 미안함으로 포장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은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노력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안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고마울 사람들에게 유의어가 아닌 '고마움 그 자체'만을 표현하고 싶다. 


내가 또 다시 자괴감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고마운, 그리고 고마울 인연을 지켜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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