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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Jun 18. 2018

중경삼림

사랑과 더불어 시간을 말하는

두 남자와 두 여자, 영화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서로 전혀 관계없는 이들의 관계는 감독의 섬세한 손길을 통해서 사랑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은 <중경삼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카메라 워크와 미장센, 그리고 화려한 색감에 대한 언급을 한다. 혹자는 왕가위 감독의 작품 세계와 그의 페르소나에 대해서 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영화에 대한 전문가적인 안목은 크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사랑에 대한 단상을 스타일리시하게 그린 영화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경삼림>은 오히려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에 유효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경찰 223(금성무 분)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며 같은 장소에 퇴근하면 가는 남자이며, 야마구치 모모에의 남편을 닮지 않아서 헤어졌다는 전 여자 친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다. 심지어 만우절에 헤어졌기에 그 농담 같은 일이 한 달만 가길 바라면서 그 날부터 매일 5월 1일이 유효기간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수집하며' 지낸다. 30일이 지나는 동안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랑의 유효기간도 끝난 것일 거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그 정도로 순수하다. 사랑도 이별도 점차 그 질량이 가벼워지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이별 하나 쉽게 못 넘기는 그런 남자이다.


어떻게 보면 한 없이 한심한, 그렇지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이다.


그렇게 순수한 남자가 어떻게 보면 자신과 정 반대에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바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그에게, 배신자를 물색하다가 지쳐버린 마약중개상(임청하 분)을 보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의 전개와 다르게 저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비워갈 뿐이다. 억지로 만들어 낸 극적인 무언가 보다는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잠깐의 휴식이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피곤함의 원인은 서로 다르겠지만.


잠깐의 휴식 이후, 그 둘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약중개상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223은 조금 더 성숙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말이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나는 달린다,라고 말하는 싸이월드적인 감성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영화 초반부의 미숙한 순수함은 보이지 않는다. 실연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많은 노력을 했다. 파인애플을 사고, 전 여자 친구의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조깅도 하고, 바에 가서 새로운 사랑을 물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를 구원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그간의 발버둥같이 보이는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러한 노력 역시 적절한 시간이 가미되었을 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녀가 남긴 편지를 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니까.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경찰 663(양조위 분)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떠나가 버린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가 두고 간 편지를 계속 받아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전의 에피소드와는 다르게 상남자처럼 이별을 지워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하다. 663은 떠나가버린 그녀가 자취가 남은 집 안의 물건들과 대화를 나누며 귀여운 궁상을 떨고 있다. 그러는 사이 페이(왕페이 분)와 663은 가까워지고, 나중에 페이는 633의 집에 잠입해 이별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주게 된다. 결국 들키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더욱 가까워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은 어긋나지만 어긋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는 서로가 다른 곳으로 향하기에 만나지 못하기에 어긋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결국엔 일정 시간이 지나고는 다시 만나게 된다. 어릴 때의 나라면, '결국 이럴 거 진작에 만나면 얼마나 좋아? 그 사이의 시간 동안 더 행복하고 가까워질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효율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아쉬워하면서 왜 이리 한심한지 혀를 찼을 것 같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영화 속 두 사람도 서로의 마음은 알지만 바로 만났다면 안 된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았을 것이다. 새로운 인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는 사랑을 포함한 각자의 인생 전반에 대해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바로 만남을 시작하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물론 당장은 즐겁게 손잡고 거리를 거닐 수 있었겠지만, 그 둘은 그보다는 현명했다. 그래서 페이는 떠나고, 633은 무리해서 그녀를 찾지 않는다.




시간은 인간보다 현명하다.

위화감의 기저에는 시간에 대한 불안함이 존재했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마약 중개인 역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가변성과 모호함에 대해서 시크하게 내뱉는 그녀가 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홀로 밤 길을 걸으며 하는 한 마디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외출할 때면 항상 비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다. 언제 비가 올 지, 태양이 뜰 지 모르니까." 다이나믹한(?) 삶을 사는 그녀 역시도 시간에 대한 주제의식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고, 저런 식으로라도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피곤함을 치유해주는 것은 복수도, 돈도 아니었다. 몇 잔의 술과 숙면의 시간일 뿐이었다.


갠지스 강에서 생각했던 바를, 영화를 보고 다시금 느낀다.


모든 것에 유효기한이 있다고 223은 말한다. 잔인하고 무뚝뚝한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올바른 가치에 대한 믿음 등의 몇몇 가치들은 영원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렇게까지 유한함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모든 게 끝이 있으니 찬란한 것이겠지.'라는 한가한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것에 유효기한이 있으니 힘든 일도 끝이 있다고 믿어 보며 시간을 관조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나도 조금은 성숙하게 인연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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