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랑의 단상을 편견 없이 엿보다
중학교 때 처음 본 영화이다. 그때는 큰 감흥 없이 보았다. 스케치북을 넘기며 고백하는 남자, 로맨틱한 총리, 그리고 곧 미국으로 떠나는 첫사랑을 위해 모든 걸 쏟는 귀여운 꼬마 정도가 기억났을 뿐이다. 그렇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 본 영화는 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보는 영화 역시 또 다르다.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은데 그때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 조금 과장하면 같은 장면도 같게 보이지 않고 울림이 다른데, 아마 이건 <노팅 힐>과 <어바웃 타임>을 만든 감독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볼 때마다 다른 영화이지만 모든 걸 초월하는 보편성은 존재한다.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따스함이 바로 그것이다.
볼수록 감동적이고 가끔은 울컥한 장면도 많은 영화이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느낀 점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중요하지만 그 감정을 외교에 까지 대입하는 정치인은 없을 것이고, 아무리 참아온 짝사랑이라지만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수줍게나마 고백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내 마음에 때가 탈 수록, 혹은 점차 사회인이 될수록,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을 점차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약간 과한 비현실적인 낭만을 감수하면서 까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내 감상은 바뀌었다.
영화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있을 법한 허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술에도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방법 외에도 다양한 화풍이 존재하듯, 영화도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혹은 주제의식에 따라서 변주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오로지 현실이라는 기준으로만 영화를 재단했다. 편협했던 관점을 조금 넓혀 보니 감독의 소구점이 보였다. 영화에서 음악으로 자주 나오는 문장인 "Love is all around"에 대해서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그리고 영화의 내용대로 사랑은 어디든 존재한다. 모든 관계가, 그 속에 있는 상대에 대한 관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무 자명한 이야기이고 항상 하는 말이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당연함을 뻔함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너무 자주 들어서 지겹고, 지금 고통스러운 나의 현재와는 너무 동떨어진 개념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대놓고 하면 꼰대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를 조금은 드라마틱하고 세련되게 전달하고 싶어서 <러브 액츄얼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친한 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가 사귀고 있던 연인과 헤어졌다거나,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잔인한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옆에서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곁에 있으니 힘내자!"라고 말한다고 가정하면..
개인적으로 그 이후의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다.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은 최소 꼰대, 최대 공감 능력이 없는 인격 장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30분의 러닝 타임 동안 여러 커플의 에피소드들이 서로 얽히듯 혹은 다른 이야기처럼 전개된다. (한국 최초 개봉판에는 포르노 배우 에피소드가 없고, 나중에 추가된 버전이 개봉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친구로, 가족으로, 동료로, 혹은 이웃으로 묘한 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한 주말 드라마처럼 인물들의 오묘한 인연을 가지고 얽히고설키듯 영화를 전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의 선택은 달랐다.
흔한 주말 드라마처럼 전개한다면 사랑이 맺어지는 과정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메인 주인공 커플과 그 주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남이 님이 되는' 상황을 큰 틀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론은 다소 비슷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는 각각의 사랑의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달달함과 따스함이 전자라면, 불륜이나 배신 혹은 사별과 같은 것은 후자의 사례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이러한 사랑의 모든 양태를 포용하면서 결론을 사랑의 따스함으로 도출해낸다. 100% 독립적으로 끊어내지 않은 옴니버스식의 구성(엄밀히 말하자면 멀티 플롯이겠지만..)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랑의 모습은 제이미(콜린 퍼스 분)의 사랑이다. 이 둘의 사랑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꼽으라면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스케치북 고백, 공항에서 뛰어가는 꼬마, 미국 대통령에게 사이다 발언하는 총리 정도가 꼽힐 듯하다. 물론 그 장면들도 좋아해서 많이 돌려봤지만, 개인적으로 여운이 남는 건 저 사진 속의 모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극화했다기보다는 최대한 털털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표현하며 서서히 자라나는 사랑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동생의 불륜을 목격하고 혼자 프랑스 휴양지에서 쉬는 제이미. 그는 별장에서 홀로 글을 쓰면서 시간을 죽인다. 차분하게 혼자서 글로 슬픔과 분노를 삭이면서 새로운 사랑에 점차 빠져들고 끝내 그녀의 동네까지 찾아가 프러포즈를 하게 된다. 그냥 실연도 아픈데, 저 정도 상처라면 어떨지 감히 상상도 잘 되지 않는다. 하나의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큰 일이기에 술이나 다른 것에 의존해서 망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담담하게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에게도, 비참한 이별에 상처받은 사람에게도, 노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있다. 권력과 빈부의 차이 없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에나 있는 그것을 향유하는 것은 힘들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주변을 둘러보고,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는 것이다.
뭐, 조금만 시간과 관심을 가지고 보면 될 일이다.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