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_라다크_레 #1

인도인듯 인도아닌 인도같은 곳

by 츤데레

옛날에 읽은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서 봤던 라다크에 도착했다. 방콕에서 델리 공항에 내렸다가 바로 비행기를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온 것이다. 델리 공항은 역시나 더웠다. 미얀마나 타이처럼 습하지는 않았지만 무더운 열기가 가득했다. 그렇지만 레 공항에 도착하니 그런 느낌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라졌다. 나와 H가 도착한 점심 무렵, 그곳의 온도는 11도 정도였다. 간략한 신고서 작성과 환전 등을 마치고, 우리는 반팔과 반바지 위에 옷을 덧입기 시작했다.


델리에서 비행기를 탄지 50분 정도 지나니, 히말라야의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 공항과 그 주변 지역은 군사지역과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무장한 군인들도 많고, 사진 및 비디오 촬영도 불가능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인도 정부 쪽에서 요즘 라다크 지역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그냥 국경 지역이라서 형식적인 훈련이 전부였지만, 최근 인도 북부 지방에서 독립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자 인도에 상대적으로 협조적인 라다크에 힘을 실어주는 추세란다. 파키스탄과 가까워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잠무 카슈미르주에서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다른 지역이긴 하지만 네팔과 합쳐지고 싶은 다르질링 쪽에 메시지를 보내고자 하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폐허가 된 왕궁과 서서히 발전하는 시내, 그리고 장엄한 히말라야까지


공항 주변은 약간 험상궂지만, 레 시내로 들어오면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레는 왕궁을 비롯한 오래된 도시의 폐허를 뒤로 하고 여유롭게 숨을 쉬고 있는 도시이다. 동시에 인간의 유한성에 대비되는 자연의 모습이 히말라야라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통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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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히말라야 여행사와 지그멧 게스트하우스의 모습. 라다크에서의 아지트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도 바빴지만, 일단 라다크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예약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먼저 여행사와 숙소를 알아보는 것이 관건이었다. 공항에서 급하게 Prepaid Taxi를 잡은 우리는 레 시내로 가서 한국에서 많이 들어봤던 '하얀 히말라야' 여행사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인 여성분과 결혼한 인도인 겟쵸가 하는 여행사라고 해서 뭔가 정이 갔기 때문이다. (물론 후기도 좋았다.)



판공초와 그 주변 지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패스가 필요하기에 관련 절차를 밟고, 동행 섭외를 위한 게시물을 붙였다. 그리고는 겟쵸에게 추천을 받은 지그멧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했다. 사장인 지그멧과 그 가족들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깔끔하고 친절해서 머물기 충분했다. 처음에는 약간 애매한 느낌이긴 했지만, 주변의 숙소 몇 곳을 둘러보니, 내가 머무는 곳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숙소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피곤한 탓도 약간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고산 적응 때문이었다. 예전에 융프라우에 갔을 때 고산 증상으로 인해 너무 힘들었던 나는 걱정을 많이 했다. 평균 고도가 3,500m라는 라다크의 레를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겁을 지레 먹었던 것이다.


숙소에서의 뷰. 히말라야라니.


그렇지만 나에게 고산 적응은 그렇게 막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뛰거나 계단 혹은 언덕을 조금 오르면 숨차기는 했지만, 못 걷거나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끔씩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답답한 느낌은 종종 있었다. 평지에 살다가 설악산 두 개를 세워둔 곳에 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하면서 적응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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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오래가지 않는다. 역시나.


내가 느꼈던 고산 적응의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처음 하루 이틀은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기

머리를 감거나 샤워하는 등의 행동은 웬만하면 피하기

과식하지 말고, 물을 많이 챙겨 먹기


이렇게만 하고 틈틈이 고산병 대비를 위해 처방받은 약을 제때 복용하면 크게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위 사항들을 충실히 이행했다. 다만 라다크에서 도착하고 처음에 너무 배가 고파서 첫날 점심 식사에 폭주해버린 것만 빼면 말이다. 물론 닭고기 카레와 갈릭 난, 탄두리 치킨과 광동식 볶음면까지 먹고 나니 너무 배가 부르고 행복해졌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은 잠시였다. 평지에 비해 산소 양이 1/2이라는 라다크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혈액순환이 느렸고, 그래서 소화도 느리게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루 종일 더부룩한 배를 부여잡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뒤로는 본의 아니게 소식을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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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하면서 책을 보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틈틈이 서예도 했다.


쉬는 동안에는 주로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책을 봤다.

지그멧 게스트하우스의 앞마당에는 텃밭 뒤로 사과나무의 무리가 있었는데, 만개한 꽃들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팝콘 같은 꽃망울이 터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그멧에게 물어보니 몇 달 후에 오면 사과를 따서 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추우니깐 늦게 열매가 열리는 것 같았다. 8월 말에서 9월 초중순까지를 추천하기에, 또 와서 사과를 맛보기로 그와 약속했다.


그러한 진귀한 아름다움을 엿보면서 여러 책들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피천득 작가의 <인연>,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의 대화를 담은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등 가져온 책들을 한 권씩 읽어 나갔다. 그리고는 틈틈이 책 속의 좋은 글귀들이나 노래 가사들을 캘리그라피로 써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고산에 적응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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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레 시내를 둘러봤다.

대도시의 여행에서처럼 명소를 곳곳이 찾아봤다는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말 그대로 발길 닿는 대로 구경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레는 그럴 만큼의 큰 도시도 아닐뿐더러, 작은 골목 하나하나가 오래된 새로움을 품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산물인 캐시미어와 파슈미르를 팔거나 수공예 제품들을 파는 곳들도 많았고, 거리의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중에 인도의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모습들을 보기는 하지만, 여기는 차분한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점이 크게 달랐다.


IMG_1160.JPG 인도와 티베트의 콜라보 같은 느낌의 소품들이 많다.




이렇게 한량처럼 시간을 2~3일 보내니, 레 시내가 뭔가 익숙해졌다. 인도 영토이긴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티베트 불교 쪽에 속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적응하기 쉬운 점도 있었다. 아무래도 힌두교보다는 불교가 익숙하니 말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라다크 왕국의 고도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우리는 레의 모습도, 그리고 다른 명소도 여행할 수 있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