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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Jul 17. 2018

확신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사회

항상 뭐뭐 한 것 같다.

"이번 기획안은 이러이러하게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될 것 같다고? 아니 여보야, 당신 지금 이거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음, 하자는 건데요.."


"그런데 이렇게 ~할 것 같다고 불확실하게 말하면 어쩌라는 거야?"


"음, 죄송합니다."


회사를 다니던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게 자주 있던 일이다. 뭐 딱히 팀장이 나를 싫어했다기 보다도 거의 모든 부하 직원들의 말 꼬투리를 잘 잡으시던 분이라 흔히 발생하던 일이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도 기분은 나빴어도 크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다만 저런 일을 겪고 나면 어릴 때부터 항상 궁금해하던 게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왜 항상 우리는 '~ 할 것 같다.', '~ 인 것 같다.'는 식으로 말 끝을 마치는 것일까?




나는 우리 사회가 '확신을 부정할 것'을 권장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실패하면 그 사람을 철저하게 밟아버리는 것이 우리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패를 한 사람이 재도전하기 힘든 구조이기에 사람들은 도전하기가 어렵다. 도전은 차치하고 심지어는 조그마한 책임마저도 피하려고 노력한다. 작은 실수마저도 생각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


비단 사업을 하거나, 꿈에 모든 것을 던져야만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생활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우리는 확신이 없다. 획일화된 답이 아니면 모든 것이 오답 처리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리스크를 가지고 물음에 답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의 경험이다. 

2000년대 극초반으로 기억하고, 당시는 수학 시간이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숫자를 빼는 개념에 대해서 교사는 설명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이해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었기에 한 명이 질문을 했다. 평소에도 수학을 잘 못하는 아이였기에 다소 터무니없는 질문이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선생님, 빼기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빼기 하면 숫자가 작아지고, 줄어드는 거야. 그냥 줄어드니까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지금보다도 더 호기심이 많았던 당시의 나는 한 마디를 던졌다.


"선생님, 빚 같은 거는 빼 지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음.. 너는 이따 좀 남자."


나는 그렇게 딴지를 걸었다. 뭐 물론 딴지를 걸거나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교사는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교사와 오랜 시간 동안 지루한 대화를 했다. 돌려 돌려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나는 교사 측에서 정한 모범 답안에 반하는 이야기를 확정적으로 했던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수업 시간에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시간의 면담은 초등학생에게 너무 버거운 책임이자 리스크였으니, 말이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부가 업무로 바뀌고, 교사가 상사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냥 똑같은 구조였다고 보면 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 더 커졌을 뿐이다. 일상 대화에서도 뭐라 확정 짓는 말을 더욱 못 하게 되었다. 그냥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인데도, "~ 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스스로의 생각을 본인도 확실하게 모르는, 아니면 알더라도 애써 희미하게 말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업무에 임할 때는 애매한 것이나 아쉬운 소리는 무조건 전화로 하라고 배웠다.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메일로 명시해서 고지하고, 문자 메시지로 리마인드 해주라는 조언도 들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한테 불리한 것은 애매하게 말하면서 기록에 남기지 말고,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그 반대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센스 있는 사회생활과 깔끔한 업무처리라는 것이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을 꽤나 잘 처리해냈다. 일은 그냥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그렇게 한 달 두 달 흐르고, 1년이 지나가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안에 무언가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과도한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더욱더 핑계를 잘 대는 미꾸라지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약간 그런 면은 있었지만, 정도가 심해졌다. 부모님께 조언을 빙자한 꾸지람도 꽤나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스스로 뭘 원하는지부터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그 조차 어렵다.


월급이 많지 않다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것까지는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대열에 내가 끼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이런 걸 생각하고 살아서 조심한다고 하긴 하는데 잘 안된다. 나도 말 끝마다 '같다'를 붙인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것 같고, 냉면을 먹고 싶은 것 같으며, 너를 만나고 싶은 것 같다. 뭐 항상 이런 식이다. 거의 30년을 그렇게 말하게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으니 잘은 안 고쳐진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지향점은 분명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뭐라고 주장을 하거나 강요는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소신과 취향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내 것은 확실하게 알고 지키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들을 스스로 깨닫고 지킬 줄 알아야, 내가 걸어야 하는 행복에 대한 방향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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