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아래는 주말부부가 되기 전, 서울에서 우리 세 식구가 함께였을 때 ‘행복’에 대해 썼던 기록이다.
겁쟁이 강아지를 데리고 새벽 산책을 나간다. 매일 다니는 산책길에 오늘 따라 사람이 없다. 강아지는 신이 나서 폴짝 폴짝 뛰다가 금방 응아를 한다. 손끝으로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한, 윤기가 흘러 반짝이는 녀석이다. 우리 강아지, 건강하구나.
이른 출근이다. 새벽에 집을 나섰는데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플랫폼에 닿자마자 지하철이 도착한다. 사람이 많지 않다. 왠일로 앉을 자리가 있다.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한다. 일곱시다. 사무실엔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늘 어색하게 인사하던 옆팀 서무님의 자리도 비어있다. 마음이 편하다. 근무시간을 달아 놓고 커피를 한 잔 내린다.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향이 사무실에 번진다. 책을 펼친다. 김애란 작가의 신작이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김애란작가의 최근작들에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이 참 좋다. 여덟시까지 책을 읽는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롯이 고독하고 조용하다.
며칠 전 야심차게 구매한 주식이 갑자기 우상향을 시작한다. 뉴스검색을 해보니 여러 가지 호재가 겹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혹시나 싶어 그 때 판매한 주식의 수익률을 찾아본다. 파랗고 또 파랗다. 일주일 째 아내를 괴롭혔던 두통이 사라진다. 이유를 알 수 없던 두통은 이유를 모른 채 사라진다. 집에 오는 길에 넷플릭스 앱을 켠다. 우연히 발견한 SF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재생한다. 의외로 재미있다. 시간이 금방 흐른다. 어느새 집이다.
아내가 치맥을 허락해 준다. 아버지가 만든 수제 맥주를 딴다. 이번엔 대성공이다.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높은 편이라 약간 취기가 오른다. 알딸딸한 기분을 안고 저녁 산책을 나선다. 하늘은 깊은 바다색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적당히 바람이 불어 모기도 많지 않다. 하얀 강아지를 안고 계단을 오른다. 작은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받쳐 든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이제 다시 써보도록 한다. 아내와 강아지가 없는 서울에서 나의 ‘행복’은 무엇일까. 조금 짧을 수도 있겠다.
오랜만에 한 번도 깨지 않고 밤새 푹 잤다. 그래서인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뜬다.
지하철까지 이십분을 걸었는데, 땀이 많이 나지 않는다. 한달이상 이어졌던 폭염은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 같다. 환승역에서 천천히 걸었는데 다음 열차가 바로 내 발 앞에 닿는다. 회사 조식 메뉴에 내가 좋아하는 분홍소시지가 나온다. 좋아는 하지만 굳이 따로 사먹지는 않는 음식이다. 그래서 더 반갑다.
직장 상사들이 휴가와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 급한 일만 얼른 처리하고 평화롭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퇴근길에 오른다. 마을버스가 시간 맞춰 도착한다. 눈치보지 않고 앉아도 될만큼 자리가 많다. 아내가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영상을 보내온다. 둥실둥실 걷는 하얀 엉덩이가 귀엽다.
집은 늘 그렇듯 한없이 조용하다. 문득 외롭다. 하지만 차가운 물을 목덜미 뒤로 끼얹으니 기분이 금방 상쾌해진다. 저속 노화 식단을 위해 사 놓은 웜 보울 샐러드를 데운다. 건강에 좋은 것 치고는 맛이 나쁘지 않다. 아내가 추천해준 <오프라인 러브>를 온라인으로 재생하고 저속 노화 식사를 한다. 시리즈의 배경인 니스가 아름답다. 웜 보울 샐러드처럼 자극적이지 않은 맛의 건강한 연애 예능이다.
주말에 쓰다만 브런치북 두 번째 글을 마저 끄적인다. 하얀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가 오늘은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몇 자 적지 않았는데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한 일들 중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을 적어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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