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우리의 첫 집은 구축 아파트였다. 작은 방 두개에 화장실 하나가 있는 복도식 아파트 2층이었다. 다행히 복도 끝집이어서 현관 앞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베란다 쪽으로는 옆 동과의 사이에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여름엔 현관과 베란다 쪽 창문을 열면 시원하게 바람이 통했다. 요즘처럼 폭염이 오지는 않던 시절이라 에어컨 없이도 여름을 났다.
결혼 두 달 전에 집을 구하고 주말에 페인트칠을 했다. 페인트 냄새가 빠질 때쯤 내가 먼저 들어가 이불을 깔고 자며 살기 시작했다. 작은 집인데도 휑했다. 그래도 냉장고가 들어온 후에는 여기가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된 집이라 단열이 잘 되지 않았다. 겨울엔 추웠다. 안방에 설치한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열기마저 고마워하며 겨울을 났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삶의 온기가 우리를 살게 했다.
주택에 사는 건 우리 부부의 오랜 로망이었다. 둘 다 한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아 온 터라 아파트가 익숙하지는 했다. 하지만 윗집의 쿵쿵거리는 소리, 단지 앞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비명 지르는 소리, 문을 열어 놓으면 종종 들어오는 담배 냄새,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없어서 몇 바퀴나 돌며 헤메야 하는 지하 주차장이 싫었다. 집을 드나들며 아무도 마주칠 필요가 없는 우리 가족만의 독립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EBS의 건축탐구 집이나, 구해줘 홈즈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우리가 주택에 살면 어떤 집이었으면 좋을까 상상했다.
강아지가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이 있으면 좋겠어, 햇살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는 중정이 있으면 해, 별채는 아니어도 구조적으로 구분되는 작업 공간이 있으면 좋겠어.
그렇게 꿈꾸며 나눠온 대화가 쌓였기에 제주집을 구할 때에도 단독주택을 우선으로 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였다.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한적한 곳으로 떠나기 좋은 위치에 타운하우스가 있었다. 이층집은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깨끗했고 필요한 가구와 필수가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엔 우리의 공간이 아닌 것 같은 어색함이 있었다. 어색함의 근원은 냄새였다. 오랫동안 머물러 온 이 집의 습기들은 쿰쿰한 냄새로 자신들이 이 공간의 주인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들여 놓은 이후에도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다른 어떤 존재가 무수히 뿜어내는 것 같은 그 냄새.
습한 냄새가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정확히는 시간이 아닌 삶이 필요했다.
아내와 나와 강아지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소파 앞에 기대어 앉아 TV를 보는 것. 가끔 다투고 화해하고 다시 키득거리며 서로를 놀리고 웃는 것.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들고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맑은 제주 바다를 예고하는 걸 보며 함께 잠에서 깨는 것.
그런 삶의 장면들이 포개어지며 오랜 시간 집에서 머물런 습기의 망령들을 비로소 덮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내와 나와 강아지의 향기를 입혔다. 이제는 비로소 이 제주집도 우리의 집처럼 느껴진다.
월요일 저녁이면 아무도 없는 집에 문을 열고 들어와 허겁지겁 샤워를 하고 밥을 먹었다. 익숙한 구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서울집을 나홀로 누리는 시간이지만, 나는 별로 하는게 없었다. 씻고 먹고 글을 좀 쓰다가 아내와 통화를 하고 잠을 잤다. 늘 보던 집의 풍경이라 어디에도 눈을 두지 않고, 집은 그저 나는 세상으로부터 단절하고 보호해주는 울타리로 또 하루를 버텨주었다.
지난 주엔 아내가 서울에 잠시 올라와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시 침대에 기대어 누웠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격자무늬 벽지가 그날따라 정갈해 보였다. 원래 이런 무늬가 있었던가. 이렇게 깔끔하고 우리 집에 잘 어울리는 벽지였나. 문득 부엌이 궁금해서 일어나 나가보니, 깨끗하게 정돈된 ㄱ자 부엌 뒤로 핑크색 타일이 귀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깊은 우드톤의 헤링본 마루와 거실 양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책들은 마치 우리 가족을 비추는 거울같다. 혼자서는 채울 수 없었던 삶의 온기가 몽글몽글 피어 오르니, 우리의 서울집이 얼마나 예뻤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늘 다시, 텅빈 거실에 누워 돌아가지 않는 실링팬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우리 세 가족이 함께 있던 이 공간이 얼마나 포근했던가를 떠올린다. 집을 완성하는 건 가구나 가전 제품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춤을 추는 삶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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