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친구

by 미립

제주에는 생각보다 작은 서점들이 많다. 베스트셀러가 존재감을 과하게 드러내는 서울의 대형 서점들과 달리, 동네 책방에는 책방지기가 고심 끝에 고르고 배치한 큐레이션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얼마 전 제주의 작은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도, 그런 의외의 만남이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사실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의 느낌은 “내 얘긴가?”하는 뜨금함이라기 보다는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라는 반가움에 가까웠다. 이런 제목을 달고 미국에서 쓰여진 화제작이라니. 최소한 세계 최강대국의 남자들 중 상당수도 나처럼 친구가 없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하지만 이 책을 사서 보기로 한 건, 그렇게 책 한권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우연히 펼친 이 책의 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메시지를 보내지 그래?”
나오미(저자의 아내)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말한다. 하얀 제모 크림을 입술 위아래, 양옆에 잔뜩 바른 모습이 꼭 멕시코 마약왕 같다.
“알았어.” 나는 투덜댄다.
“자기는 항상 말만 하고 행동을 안 하지. 벌써 몇주 동안 친구를 만들겠다고 말만 하고 아무것도 안 했잖아. 친구가 필요하면 누구에게든 문자를 보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왜?”
“모르겠어… 무슨 말을 보낼지. 할 말이 없거든.”


마치 나와 아내의 대화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내는 종종 나의 몇 안되는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K는 잘 지낸대?” “J네 애들은 학교 들어갔나?” “S는 아직 전에 그 곳에서 일해?” 그러면 내 대답은 보통 이렇다. “아마 그럴 걸?” “그렇지 않을까?” “그렇겠지 뭐….”


남편(나)이 왜 친구를 만나지 않는가, 하는 이슈는 종종 우리 부부에게 대화의 주제가 된다. 물론 그 주제를 끄집어 내는 건 아내다. 나는 아내가 그 주제를 꺼내기 전까지 별다른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 주제에 관해 나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아내가 가장 완벽한 친구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친구는 필요하지 않아.


하지만, 기왕 만들어 놓은 좋은 친구들까지 굳이 멀리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아내의 논리적 주장에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내가 나의 몇 안되는 착하고 건전한 친구들을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게으름 뿐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이라고 단순히 표현했지만, 내가 이 게으름의 허들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남자 사람 친구들과 내가 형성한 우정의 오랜 습관 때문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했다. 게임을 하거나, 당구를 치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거나, 축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마치 ‘친구’라는 말의 의미가 ‘혼자하기 아쉬운 것들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만남의 구실이 필요했다. 더이상 게임이 재밌지 않고, 노래방은 유행이 지났고, 축구는 힘들어서 못하고, 술은 회사나 집에서 충분히 마시게 된 이후, 나는 그들과 함께할 것이 사라졌다.


그의 삶이 궁금하고, 걱정되고, 그리워서 게으름의 허들을 넘어야 하는데, 그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감정을 그 자체로 끌어올리는 것이 여전히 어색하다. 그래서 늘 ‘연락 한 번 해야지.’ 하는 마음은 ‘다음에…’로 마무리된다.




벌써 몇 해 전이었다. 나의 간소한 절친 리스트를 채우고 있는 K에게 토요일 저녁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나 서울인데, 저녁 같이 먹을까? 너희 집 근처인데 갈게.” 그 때 나는 K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나 지금 아내와 저녁 먹고 있어서 좀 그런데. 다음에 보자.”


사실 그건 핑계였다. 아내와 나는 저녁을 준비 중이었다. 카레였다. K는 아내와도 아는 사이어서 함께 저녁을 먹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 얘기를 하니, 아내는 부르지 그랬냐며 아쉬워했다. 나는 단지, 아내와 둘이 저녁 식사를 하며 온전히 편안한 토요일 저녁을 보내고 싶었다. K를 너무 좋아하지만, 그 완벽한 평화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 날 이후, K는 그렇게 문득 내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었다. 종종 모임에서 만났고, 여전히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주말 부부가 된 후, 어차피 혼자있는 평일 저녁인데, 최근 서울로 일터를 옮긴 K를 만나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한 게 벌써 몇달 전이다. 아직도 나는 K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핑계는 여전히 많았다. 회사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출장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요즘 눈떨림이 심해서, 치과를 가야 해서, 미루다 보니 여름이 오고 심지어 35도가 넘는 폭염이어서…


‘친구’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할 때, 처음 생각했던 건 “나의 완벽한 친구, 아내”에 대한 사랑고백이었다. 그런데 쓰다보니 ‘친구없는 남편의 반성문’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마무리할 수는 없다. 정신승리를 위해 나는 오늘도 아내에게 말한다.

내가 친구가 없는 이유는, 네가 너무 완벽한 친구여서야.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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