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기념일(紀念日) : 축하하거나 기릴 만한 일이 있을 때, 해마다 그 일이 있었던 날을 기억하는 날
[표준대국어사전]
나는 세레모니에 의미를 부여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다. 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숫자를 이름처럼 새기고 그것의 월과 일이 반복된다고 해서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일이라는 것도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생일을 위해 선물을 주고 받지도, 구태여 모여서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회사 같은 곳에서 누구의 생일이라며 팀원들이 모여 케익에 촛불을 켜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그 광경이 어색하고 오그라들어서 고개를 숙이고 웅얼웅얼 노래를 따라부르는 척만 한다. 내 생일이 주말에 껴 있으면 그 전 금요일이나 그 다음 월요일에는 제발 아무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아내와의 기념일은 그렇게 대충 웅얼거리고 넘어갈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아내는 이른바 기념일 챙겨먹기 대장이어서 서로의 생일, 연애를 시작한 날, 결혼기념일 등 타이틀이 달릴만한 어떤 날이든 예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함께 웃으며 박수를 치고 호오 바람을 불길 바랐다. 심지어 크리스챤이 아닌 데도 크리스마스엔 예수님의 탄생을 케이크와 촛불과 함께 축하하길 원했다. (어쩌면 아내는 그냥 케이크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꼬박꼬박 빠짐없이 부지런히 기념일을 챙겨왔다. 누구 하나 잊고 지나가서 서운해 한 적도 없었으며, 챙기는 게 부담스러워서 다툼이 생겼던 적도 없었다.
하나 하나를 정성들여 축하하다보면, 기념일은 우리의 관계가 길을 따라 잘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이정표가 된다. 핑계삼아 건네는 편지는 말로는 전해지 못했던 깊은 감정들을 전해준다. 그리고 편지를 쓰면서, 선물을 고르면서, 그걸 받고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상상 이상의 반응을 실제로 내 눈으로 보면서 나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를 다시 깨닫는다.
아주 연애 초기에는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하는 줄 알아서 화이트데이엔 내가 사탕을 주고 발렌타인데이엔 아내가 초콜렛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빼빼로데이엔 커다란 빼빼로를 건네준 적도 있다. 그러다 연인 경력이 좀 차면서 괴상하고 유치한 상술에는 휩쓸리지 않기로 선언했다. 11월 11일이라서 빼빼로라니. 이런 1차원적 사고에는 동의할 수 없으니 이건 패스. 발렌타인이 여자라서 화이트가 남자라니, 너무 명백한 상술이므로 이것도 패스. 하지만 이 시기는 기념일 비수기이므로 우리 서로를 위해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조금 더 유치한 화이트데이는 패스하고 조금 덜 유치한 발렌타인데이에는 서로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사서 선물하는 우리 둘만의 전통을 만들었다.
물론 사서교사 출신의 책 전문가이자 자기 이름으로 출판 경험까지 있는 에세이스트에게 책을 선물해야 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전통이기는 하다. (내가 선물한 책의 상당수는 전문가의 눈높이를 채우지 못하고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다.)
오늘은 우리가 연인이 된지 16년되는… 날의 전 날이다. 원래는 내일을 기념하기 위해 케이크를 예약했고, 이 케이크는 내일 저녁에 촛불과 함께 사진이 찍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케이크는 오늘 픽업되었고, 하필 테라로사 드라이브스루에서 산 커피는 너무 맛있었으며, 점심을 먹고 집에 왔을 때 즈음에는 어느 정도 소화가 되어서 커피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싶은 마음이 두 사람 다 뭉게뭉게 피어났다.
16년차 연인이자, 30년차 친구이자, 11년차 부부에게는 기념일을 하루 정도 당기고 점심에 거실 불을 끄고 촛불을 켤만한 유연함은 있는 법.
우리는 그렇게 대낮에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헤헤 웃으며 열 여섯번째 첫 날을 기념했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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