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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다시 제주행 쾌속선을 타게 될지도

바다

by 미립

바다가 무섭다는 걸 안 건 아주 어릴 적이었다. 명절이면 아버지의 형제들이 있는 부산을 찾았다. 부산에 가면 동백섬, 해운대, 광안리 해수욕장을 가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여덟명 정도가 타는 작은 배로 부산 근교의 작은 섬을 간 적이 있다. 무슨 섬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섬으로 가는 뱃길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날은 조금 흐렸고 비는 오지 않았다. 파도가 높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아주 잔잔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작은 통통배는 마치 일렁이는 파도의 높은 면들을 살짝 스치듯이 붕 떠서 날았다. 조금이라도 방향을 틀면 뒤집혀 버릴 것만 같았다. 넓은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저 멀리 섬이 보이기는 했다.) 무서웠다.


바다가 무섭다는 걸 다시 알려준 건 아프리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가족여행을 갔을 때였다. 가이드투어의 코스 중 하나로 바다위 어느 바위섬(Duiker Island)에 모여 사는 물개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 날도 날은 흐렸고, 비도 조금 내렸다. 우리는 30여명이 타는 관광용 배에 몸을 실었다. 항구 근처는 무난했다. 비가 조금 내리니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 하지만 항구가 멀어지자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배는 마치 뒤집힐 것처럼 휘청이기 시작했다. 바이킹을 타듯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거꾸러지기를 반복했다. 이쯤되면 물개가 아니라 인어를 볼 수 있다고 해도 단단하게 내 두 다리를 고정시켜 줄 땅으로 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날 나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배를 타지 않겠다는 다짐은 파도에 지워진 모래사장 위의 낙서처럼 사라졌다.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한 뒤, 해외여행을 가지 않게 된 우리 부부는 매년 제주도를 찾았다. 겁쟁이 강아지 무늬를 어떻게 제주도를 데려갈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것이 배였다. 완도나 목포, 또는 진도까지 차를 몰고 내려가서 차와 함께 배를 타고 제주로 내려가는 것은 매년 우리가 휴가를 보내는 당연한 방식이 되었다.


덩치가 큰 여객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태풍이 와서 많은 배편이 취소되던 때에도, 우리는 하루 차이로 태풍을 피해갔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6시간이 걸리는 제주행 여객선은 밤에 출발해서 자고 일어나면 제주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차를 타고 (렌트카 회사를 들를 필요없이) 여행지에서의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 방식의 제주여행은 늘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좀 더 빨리 제주를 가고 싶은 마음에 1시간 30분이면 제주에 닿을 수 있는 쾌속선을 타기 시작했다. 겁쟁이 강아지 무늬가 짧은 시간만 배에 머무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큰 메리트로 다가왔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배가 작아서 차를 싣고 내리는 것도 다른 배들보다 빨랐다. 쾌속선을 타고 쾌속으로 제주 여행을 시작하면서 쾌재를 부르던 날들… 그런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쾌속선을 탄 건 아마 지난해였던 것 같다. 날이 좀 흐렸다. (이 때 알았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출발할 때 방송에서는 오늘 해상이 불안정하여 선박이 흔들릴 수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때라도 알았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조금 흔들리려나 보다,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제주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잠에서 깨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배가 심하게 울렁거렸기 때문이었다. 하필 앞과 좌우가 다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도 패착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수평선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걸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탄 배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최선을 다해 바다로 다이빙을 하는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공포감이 밀려왔다. 아무리 먼 곳을 바라보아도 바다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휘청이면서 바다 위에 영원히 떠 있을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바다의 무서움이 다시 떠올랐다. 한시간 반이면 제주에 닿는다는 쾌속선은 세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쾌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다시는 쾌속선을 타지 않겠다고 함께 다짐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언젠가 다시 제주행 쾌속선을 타게 될지도 모른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극한 호우가 만들어낸 난기류를 뚫고 두시간반이 걸리는 제주행 비행기를 타보니,

파도의 일렁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도착한 제주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는 애월 해안도로를 타면

조금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며 검은 바위들이 부서지듯 땅과 바다의 경계를 만들고


동쪽 바닷가를 따라 내려가면

구불구불 휘어진 해안선을 따라 작은 어촌마을들이 파란색 지붕을 동그랗게 모아두고 있으며


남쪽 바다의 모래 사장에 몸을 담그면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닷물 사이 저 편으로 송악산의 절경이 펼쳐져 있는 데다가


인간의 기억력이란 다행스럽게도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을 뒤덮어서

아, 이것도 어쩌면 해 볼만한 것인다 보다,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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