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어느 날 내가 연락이 안 되면 이곳으로 찾으러 와.
나와 남편. 우리는 둘 뿐이지만, 나름 시기마다 유행하는 유행어를 가지고 있다. 저 말은 내가 꽤 오랫동안 밀었던 말이다. 있어야 할 게 다 있어 좋지만, 그게 또 많아도 너무 많아서 정 붙이기 어려운 서울. 둘 만으로도 충분한 우리가 된다 여기는 관계의 미니멀리스트가 서울이 견디기 점은, 무엇보다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가득 찬 서울은 공간의 경제가 지배하에 있다. 한 사람에게 허락된 공간은 곧 돈과 시간이다. 그 공간을 넓히려면 그만큼의 돈을 주고 공간을 사거나, 혹은 시간을 써 선점해야 한다. 돈도 시간도 넉넉지 않았던 우리는 늘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곳을, 가장 복잡한 시간에 통과해 일터와 집을 오갔다. 남편과는 대학생 때부터, 연애하던 시절을 거쳐,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줄곧 서울에서 지냈다. 다행히 둘이 있으면 늘 재밌는 일이 생겼기에 우리는, 서울 구석구석을 참 부지런히 누비며 잘 놀았다. 종종 지도앱이 알려주지 않는 이면도로, 핫플레이스의 그나마 한적한 찰나 같은 도시의 작은 틈을 찾곤 했다.
그럼, 어느 날 내가 연락이 안 되면 이곳으로 찾으러 와야 해. 알았지?
봉은사, 그중에서도 경내에서 지대가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대웅전의 처마 뒤태가 보이는 북극보전 마당. 가로등이 간접등처럼 드리워 양화대교를 올려다보고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게 하는 선유도 공원 구석 어딘가. 250여 년간 조선의 정궁으로 쓰이던 궁궐과 담을 이웃한 대학교의 법학관 옥상. 정신을 쏙 빼놓는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이 작은 틈을 용케 찾았다는 것, 그리고 이곳이 생각보다 아늑하다는 것. 그 덕에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그래서 곁에 있던 남편을 향해 외치듯 말했다.
그런데 어쩌면 저 말은 이 뜻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싫지만,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곳이 독차지하고 싶을 만큼 너무 좋은 곳임을, 누군가 일러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또 알았다. 나 만큼이나 사람이 많은 곳이 어렵고, 혼자 숨어있기 좋아하는 남편에게도 이곳이 필요한 날이 있을 것임을. 그래서 남편도 이곳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말했다. 언젠가의 어떤 날, 숨고 싶을 때 이곳에 머물다 가라는 것. 그리고 다른 어떤 날엔 날 찾으러 오라고. 날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제주는 온통 바다다. 가는 곳마다 눈에도, 마음에도 바다가 걸린다. 한라산에 가까워질수록 바다에서부터 멀리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러다 문득 다시 시야에 바다가 들면 또 왜인지 안심이 든다.
거기 바다가 있구나.
요즘은 가는 바다마다 나의 유행어를 말하고 싶다. 이 섬에서도 사람이 없는 곳으로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지도에 나오지 않는 바닷가, 해변으로 닿는 길이 숨어있는 바닷가,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다 알아서 쉬쉬하며 몰래 다녀가는 바닷가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부러 찾아갈 필요가 없다니. 촌스러운 서울 여자는 언제까지 바다를 향해 감격에 달뜬 표정을 지으려나.
바다에서는 남편이 찾으러 오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파도는 등을 떠밀고, 바람은 손을 잡아당긴다. 해변에 앉아 지겨울 때까지 일렁여본다. 그럼 한껏 열기찬 마음에 닿아 상념들은 그을려 타 버린다. 재가 되어 날아간다. 그럼 엉덩이에 콕콕 박힌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집으로 돌아갈 때임을 이젠 안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https://brunch.co.kr/@mag-in/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