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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귄 지 5843일, 추억을 완성하는 법

기념일

by 홍지이

내일은 남편과 사귄 지 5843일째 되는 날이다. 결혼을 한 뒤에도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을 곁에 두었다. 멋진 호칭을 가진 결혼기념일처럼 대중의 인지도가 있는 날은 아니지만, 우리 나름의 추억이 있어서 결혼으로 덮어두지 않고 기념하고 있다. 사귀기로 한 즈음, 용기 내어 손 잡아도 되냐고 물었는데 너무 당연하게 '안 돼.'라고 한 내게 무척 서운했다며, 늘 이맘때쯤 되면 남편은 영원히 나이 들지 않을 그 풋풋한 마음을 내보인다. 참 다르다. 그날의 난 생각보다 떨어진 늦여름의 저녁 기온에 몸이 으슬거렸다. 민소매 위에 걸쳤던, 내겐 소매가 길어 손등까지 덮었던 남편의 넉넉한 셔츠를 얻어 입었던 기억뿐인데. 서로 다른 기억을 모아 그날을 추억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념일답게.


나는 쉽사리 추억을 버리지 못한다. 꼭꼭 눌러 담아 간직하고, 필요할 때 풀어헤쳐 만지작 거린다. 그래서 기념할 일도 많다. 적어도 매년 두어 달에 한번 꼴로 케이크를 사게 된다. 한 달 전부터 어떤 케이크를 살지 살펴보기 때문에, 거의 매달 케이크를 생각하고 있다. 너무 쉽게 케이크의 저주에 걸려버린 여자. 여자는 자신과 남편의 생일, 반려견의 생일, 결혼기념일, 사귐 기념일, 크리스마스에 늘 다른 케이크를 산다. 거기에 종종 생기는 비정기적인 기념일에도 케이크를 들인다. 가족과 함께 하는 행사에서도 케이크를 모신다. 양가 부모님의 생신, 형제자매의 생일, 조카의 생일, 친구의 생일까지. 케이크를 먹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달은 없어 보인다.


기념일 - 케이크 = 0


크림과 과일과 빵으로 쌓아 올린 기념일의 모습은, 다소 특이한 집안 배경에서 기인한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친척들의 집이 여럿 있었다.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우리 집은 1000여 세대가 넘는 제법 큰 아파트 단지였는데, 30여 개의 동 중에서도 같은 동(다행히 층수는 다름)에 큰아버지 댁이 있었다. 길 건너의 아파트에는 할머니와 고모가 살고 계셨고, 그 옆 단지에는 작은 아버지 댁과 큰 이모, 막내이모 댁이 있었다. 그곳에서 고등학생 무렵까지 살았다. 집성촌은 아니었다.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신도시의 베드타운이라 모여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기에 여건이 되면 다들 그렇게 모여사는 건 줄 알았다.


잠시 가족의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은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임을 잊지 말자. 우리는 한 달에 한번 꼴로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아침이면 생일을 맞은 이의 집으로 가서 다 함께 아침 식사로 미역국을 먹고는 학교로, 직장으로 흩어졌다. 저녁엔? 다시 모였다.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종종 식사를 못 하는 날이 있어도 빼먹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케이크! 한 곳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생일을 맞은 자가 케이크에 꽂은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비는 모습을 함께 바라봤다. 그리고 케이크를 조각 내 나눠 먹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염원하고 축복하는 것, 내겐 그 행위의 총체가 케이크였다.


내 남편은 나와 연애를 하며 '세상에 이런 애도 있구나' 싶었던 순간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자주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생일 때 가족들과 케이크를 나눠 먹는 걸 하지 않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사실 생일을 왜 축하하는지 아직도 잘은 모르는데 내가 좋아하니 함께 한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삶에 케이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연애를 할 때는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주변의 연인들이 그러하니 비슷하게 따라서 기념일에 케이크도 폭죽도 터뜨리고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기념일이면 대부분 그러하듯 손바닥 만한 하트 모양의 케이크를 마주 보고 서로를 축하했다. 그런데 그의 여자 친구는 혈중 케이크 농도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하는 사람인 양, 커플 기념일 생일 외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케이크부터 찾는 것이었고, 그는 결혼을 한 뒤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의문을 품고 있다.


'너 사실은 케이크가 먹고 싶은 게 아니야?'


기념일마다 맛있고 새로운 케이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사실 그 말도 맞다. 홀케이크가 주는 넉넉함이 좋다. 그런데 기념할 게 없는데 케이크 박스를 집에 들이는 건 뭔가 이상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실은 올해 제주에 입도한 날도 기념할 참이다. 아직 1년이 되지 않았기에 남편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될 텐데,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그리고 8월 30일. 내일은 남편과 내가 연인이 된 날이다. 도래한 기념일을 맞아 올해도 5843일 전의 푸릇했던 어린 나와 딱 나만큼 어렸던 너를 품어본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쌓아 올리며 지켜온 약속과 지나온 풍경에 대해 떠올려본다.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다면 꺼내서 보여줘야지. 그럼 남편은 나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의 모습을 알려줄 거다. 둘의 기억을 모아 하나로 합쳐본다. 그럼 진짜 추억이 완성된다.


우리 함께 앞으로도 더 많은 기념일을 열심히! 만들어보자.

(더 많은 케이크를 먹어보자. 읽힌다면 그것은 기분 탓 :D)



우리가 먹어온 수많은 케이크들. 대충 찾았는데 너무 많아서 이 정도만 올려보는 것으로.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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