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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같은 반 남자애가
남편이 되었다

친구

by 홍지이


# 같은 반 남자애 A


사촌 동생들도 죄다 남자 애들이고, 집에도 연년생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그랬을까. 초등학생 때는 나이가 같아도 남자애들은 하나같이 한 두 살 어린 동생처럼 보였다. 장난을 걸어도 무시했고,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유치해' 란 말로 갚아 주었다. 그래도 같은 반에 또래보다 (그나마) 덜 유치한 남자애 하나가 있긴 했다. 반에서 두 번째로 키가 커서 단체 사진을 찍으면 삐죽 튀어나오곤 했던 애. 초등학교 졸업식 날, 부모님끼리 친분이 있던 장난꾸러기 친구가 걔를 나의 부모님에게 데려오더니 '아줌마, 미래의 사위 여기 있어요!'라는 되지도 않는 농담을 했다던데.


# 사촌동생의 베스트프렌드 A


고2가 되고 나서 모의고사 성적이 스트레스였다. 특히 수리탐구영역 점수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당시 경기도 일대에서 붐을 일으켰던 입시 학원이 있었다. 고3을 앞둔 겨울 즈음, 처음으로 공부하는 학원에 제 발로 걸어갔다. 새 등록생을 위한 학원의 오리엔테이션 날, 명성만큼이나 나처럼 우중충한 표정을 한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이!


"야! 너 여기 왜 있어?"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의 사촌 남동생이었다. 우린 동급생이지만 동생은 나보다 반년 가량 늦게 태어나서 말을 할 수 있을 무렵의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누나인 것으로 족보 정리를 마쳤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누나!"라고 부르는 착한 아이다.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애도 낯이 익다.


A였다. 쟤는 왜 여기 있지? 쟤도 나처럼 모의고사 죽썼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A와 나의 사촌 동생은 초, 중, 고를 내리 같은 학교를 다닌 운명의 친구였다. 중학교는 둘이 같은 학교에 배정되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고등학교까지 같았구나. 둘의 운명도 어지간히 징글징글했나 보다. 심지어 같은 반이란다. 다행히 둘은 성향이 잘 맞아서 학원까지 함께 다니는 베프가 되었나 보다. 동네가 작으니까 이렇게 마주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서로의 삶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로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있어서 인사도 나눴다. 잘 살고 있구나 싶었다.


# 대학 동기 A


대학교 입학식 하루 전, 신입생들을 커다란 강당에 모았다. 무대에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바삐 오르락내리락하며 무언가 열심히 설명했다. 경기도에서 상경한 탓에 마음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 먼 곳까지 부르다니. 괜히 왔다 싶어서 몰래 나가야지 하던 참이었는데 누군가 내 바로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이것으로 도망가려 했던 퇴로가 차단되었다. 하필 왜 여기 앉아가지고, 게다가 보통 일행이 아니면 한 칸 띄어 앉지 않나? 원망 섞인 마음으로 흘깃 봤다. 그런데 옆자리 그가 대뜸 내 시야 안으로 손을 흔들어 넣는다. 누구? A였다.


"뭐야! 너도 우리 학교 왔어?"


우리는 서울로 대학을 가면 소소하게 소문이 날 만큼 작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나는 수시로 조금 일찍 합격을 해서 소문의 유통기한이 길었던 탓도 있었을 거다. 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예비 소집일에 오며 혹시나 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는데. 뒷모습마저 새침한 내가 한눈에 들어와서 반갑다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2학년부터 전공수업을 듣는 시스템이라, 우린 1학년을 같은 수업을 들으며 어울렸다. 둘 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에 재능이 없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취미도 없었다. 그러나 군대를 가며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고 매일 수업에서 보던 때만큼 연락을 할 거리도 없어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제대를 한 그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 동네 술친구 A


그는 과를 옮기려다 아예 학교도 같이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졸업이 조금 늦어져 대학생인 그.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나도 그도 생활권은 서울이었지만, 언제나 지친 걸음으로 사당역에서 출발하는 광역버스에 몸을 욱여넣어 집으로 향해야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경기도민이었다. 20대 중반, 나는 또각거리는 구두에 정장을 입고 한껏 어른스러운 척을 하던 중이었다. 새로운 공부와 진로가 썩 마음에 들었던 그의 눈빛 또한 더욱 또렷해져 있었다. 그즈음, 나는 생명력을 잃어가는 연애에 무의미한 심폐 소생술을 하느라 진을 빼는 중이었다. 시절은 자연스레 우리 둘 사이를 씁쓸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술친구로 정의했다. 엄마가 전화를 하면 '엄마 나 집 앞이야. 지금 미립이랑 있어.'라고 했는데, 그럼 이상하게 엄마는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 마침내, 남자친구


손을 잡고 걸어도 땀이 나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 시원함이 드리워진 늦여름 밤.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어.'라는 말과 함께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둘의 공통의 친구들의 반응은 신기하리만치 비슷했다.


"뭐? 걔? 내가 아는 미립?"


우선 처음에는 화들짝 놀란다. 그런데 그 놀람은 그라데이션처럼 옅어지더니, 강한 확신으로 마무리된다.


"아유, 너네 그럴 줄 알았어."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볼 때는 몰랐는데, 둘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알겠단다. 말투도, 성격도, 취향도, 느낌도 닮았다고.



남편은 '우리가 친구였던 시절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럼 나는 묻는다. '그러니까, 언제?'


참 오랫동안 친구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어온 인연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불쑥 나타나던 친구라 내내 돈독하진 않았지만, 함께 했던 시절마다 잔잔한 추억이 있다. 원래 사람을 깊고 오래 사귀는 걸 좋아하는데, 남편은 삶을 통틀어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영역도 점하고 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끄집어내면 이야기의 중심에 없어도 주변부 어딘가에 서로가 있다. 세헤라자데는 천일 하고도 하룻밤 동안 이야기를 했다던데, 우리도 우리 이야기를 이어 붙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참 좋다. 아니,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 같다. 가장 오래된 친구를 남편으로 삼은 거.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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