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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에 엄마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아

엄마

by 홍지이


7월 초 즈음, 자주 가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피드를 연일 떠들썩하게 한 과일이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기간이 1년에 단 2주뿐이라 지금 놓치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문구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극강의 당도, 기적의 브릭스, 달디달디단 그 과일의 정체는 이름마저 고혹적인 신비 복숭아였다.


로켓 배송을 기대하긴 사치인 제주, 그 중에서도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살고 있다. 오프라인으로 복숭아 구입 원정을 가야 했다. 지역 맘카페에서 '신비 복숭아'를 검색했다. 하나로마트나 이마트에 가면 있다고 글을 남긴 이타적인 이웃분들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가까운 제법 큰 하나로 마트에 갔다. 지역 맘 카페의 집단 지성은 필승이다. 다행히 신비 복숭아 재고가 넉넉히 있었다. 가격과 품질을 살펴봤다. 마음 같아서는 10개가 조금 넘게 든 박스 한 개를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주중 1인 가구에게 복숭아 10개는 부담이다. 아침마다 그릭 요거트에 부지런히 올려 먹으면 5개 정도는 상태가 온전할 때 먹을 수 있겠지?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다 큰 결심을 하듯 엄숙한 동작으로 소량 포장된 플라스틱 용기를 집어 들었다. 주중 한정 1인 가구가 되니 냉장고에 과일 들이기가 여간 껄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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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엄마와 아빠의 어리광쟁이 둘째딸로 살 때는 냉장고를 열면 늘 제철 과일이 있었다. 한 입 크기로 예쁘게 손질되어 네모 납작한 유리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걸 본 나의 생각은 예쁘네, 정도로 밖에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꺼내 홀랑 먹곤 했다. 요즘엔 마트에서 과일을 손질해서 소량씩 파는 게 물선 풍경은 아니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거나 꽤나 비싸서 고급 백화점에서나 취급했었다.


해마다 여름은 왔고, 여름의 부름에 엄마와 아빠는 부지런한 수박 나르기로 응답했다. 그들은 날랜 2인조였다. 주먹왕 랄프처럼 큰 손을 가진 아빠는 퇴근길 아파트 단지의 과일가게나 수박장수 아저씨의 트럭에서 진녹색 수박을 과일 그물에 낚아 오셨다. 엄마는 망설임 없이 가장 큰 도마와 칼을 꺼내 날렵하게 껍질의 초록과 흰 영역을 벗겨내고 빨갛고 촉촉한 과육을 찾아냈다. 아빠는 부지런히 수박을 날랐고, 엄마는 더 부지런히 수박을 쪼개고 자르고 또 잘랐다.


내 머리보다 큰 수박은 한입 혹은 두 입에 베어 먹을 만큼의 사이즈로 깍둑 썰기 되었다. 냉장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인 수박은 엄마의 수박 해체 시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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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맞은 첫 여름. 4월에 결혼했으니 신혼 중의 신혼이었다. 남편과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카트를 끌며 장을 보는 게 한참 재밌을 시기였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장을 보다 수박 한 통을 사서 집에 왔다. 엄마처럼 네모 반듯하게 썰어서 냉장고에 넣어 놓는 엔딩을 생각하며. 집에 와서 수박을 도마에 올려놓았다. 이제 보니 마트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단단했다. 수박을 반으로 쪼개는 것부터 쩔쩔맸다. 껍질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제법 힘이 들어가는 칼질을 했더니 손은 덜덜,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찌저찌 자른 수박을 유리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뿌듯했다.


그런데 우리집에 수박 귀신이 있나? 분명 신혼집엔 나와 남편, 둘 뿐인데 냉장고 속 수박은 실로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돌아서고 나니 다시 수박을 사야 했고, 다시 잘라야 했다.




결국 그 날은 수박 한 통 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리고 더 비싸고 양도 적은데다, 기분 탓일지 몰라도 왠지 맛도 부족한 듯한 잘린 수박을 사서 먹게 되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때늦은 감사의 말은 못할지언정, '신혼집에 엄마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아.' 라며 괜히 어리광을 부렸다. 올해 여름, 여전히 서울집 냉장고에도, 제주집 냉장고에도 수박은 없다. 수박은 커녕 이젠 복숭아 몇 알도 데려오기 부담스러운 주말 부부 신세다. 다행히 신비 복숭아는 성할 때 다 먹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종종 떠오른다.

작은 몸집으로 커다란 수박을 두 동강 내던 씩씩한 엄마의 뒷모습,
주방에 가득찬 상쾌한 수박 내음,
그리고 칼이 도마가 맞닿을 때마다 나던 호쾌한 리듬까지.

모두 다 그리운 여름의 풍경이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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