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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여자라면, 아페리티보(Aperitivo)

음식

by 홍지이

몇 해 전 여름, 남편과 여름휴가로 이탈리아에 갔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휴가는 약 2주. 길지 않은 여행 기간이지만 감지덕지하며 부지런히 움직일 마음을 먹었다. 이탈리아는 비스듬히 누워있는 부츠의 형상을 닮은 대륙이기에 남쪽과 북쪽 어딘가에서 출발해 대륙을 종단하기 좋았다. 우린 북쪽 밀라노에서 시작해 피렌체, 산지미냐뇨, 시에나를 거쳐 중부의 아시시, 그 아래 로마, 남부의 폼페이와 아말피까지 들려보기로 했다. 손해 보지 않는 여행 동선을 짜는 것에 몰두하는 편이라, 기차 편을 착착 맞춰 타고 이동하며 꽤 많은 도시의 맛을 그야말로 찍어 먹으며 다녔다.


지중해의 햇살은 양도, 질도 놀라웠다. 머리 위에서 노려보는 한낮의 태양은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차원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시간을 가진 여행자였다지만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떠 그림자마저 내 몸 쪽으로 바짝 붙어 숨으려 할 때면 나도 피할 곳을 찾았다. 주로 커다란 차양을 드리운 노천카페로 피신했다. 여행 초반부를 넘어서니 테이블마다 공통점이 보였다. 여기도 그런가?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 테이블을 넘겨다 보았다.


그럼 그렇지. 여기도 있다.
밀라노에서부터 시작해 도시 대부분의 노천 테이블에
빠짐없이 놓여있는 저 오렌지빛 음료!

저 음료 대체 뭐지?



그 음료는 이름마저 쨍하게 멋진 '스프리츠(Spriz)'.


스프리츠는 여기 이탈리아뿐 아니라 많은 유럽국가에서 여름에 즐겨 마시는 칵테일이다. 스파클링 와인과 비터 리큐르, 소다수를 취향에 맞게 비율을 조정해 섞은 대표 식전주란다. 잠깐, 식전주?


식전주(食前酒) 또는 아페리티프(프랑스어: apéritif, IPA: [a.pe.ʁi.tif])는 식사 전에 마시는 술이다. 보통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식사 전에 제공된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부터 식전주가 흔했으며 로마, 나폴리, 투란, 베니스, 피렌체 등의 대다수 카페에서는 거의 제공되었다. 유럽 전역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그 개념이 대중적으로 퍼졌다. 이 개념은 1900년 경부터 대서양을 건너 전파됐으며 미국에서도 널리 적용됐다. [출처 : 위키백과]


식전주라니! 맙소사. 어째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술의 존재를 여태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

유럽과 미국은 이 좋은 것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쉬쉬하며 먹고 있었다니. 세상이 나를 왕따 시키나 했더니, 정말 그럴지도. 구글의 2022년 검색 트렌드의 칵테일 부분에서 스프리츠의 대표 리큐르 '아페롤'로 만든 '아페롤 스피리츠'가 1위를 했단다. 아페롤 스피리츠는 1초에 14잔이 팔릴 만큼 대중적인 술이었다.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억울했다. 뒷북의 달인이 된 나와 남편은 서로를 위로하듯 와인의 나라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1일 1 스프리츠를 마셨다.


이탈리아 여행이 좋아서 그랬는지, 남편과 이듬해에는 스페인을 다녀오고, 몇 년 동안 여름이나 겨울 휴가로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몇몇 국가를 여행했다. 물론 다양한 식전주를 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셰리, 독일에서는 리슬링 와인을 마셨다. 대부분 적당한 사이즈의 잔에 담겨 있기에 부담 없었다. 술잔 입구에 코를 욱여넣어 상쾌한 향으로 코를 깨운다. 그 후 이내 홀랑 입에 털어 넣으면 비어 있는 식도와 위장을 따라 찌르르 흘러가는 느낌이 짜릿하다. 마치 소화 기관의 세포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낯선 감각. 타파스와 같이 작은 접시에 담긴 간단한 핑거푸드를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단전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약간의 취기를 느낄 때쯤 식사가 서빙된다. 식전주가 조율해 낸 그 흐름이 좋았다.


사실 소식을 하는 편이라 전식과 본식, 후식을 갖춰 제공하는 파인 다이닝에는 남편 없이 못 간다. 아, 정확히는 '코스마다 남긴 음식을 먹어줄' 남편 없이 못 간다. 물론 남기고 다음 코스를 먹어도 된다. 그런데 남긴 접시가 주방에 도착하면 '내 음식이 맛이 없나?'라 상심할 셰프의 얼굴을 상상해버렸다. 극강의 공감능력 소유자는 그 이후부터 양이 많은 식당도 잘 못간다.


남편은 농담처럼 "넌 애피타이저를 먹을 능력이 없어."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소식을 하는 내게도 멋진 애피타이저가 생겼다. 바로 식전주. 식전주를 애피타이저로 즐기게 된 이후, 난 실로 애피타이저 계의 푸드 파이터라 불려도 될 만큼 성장했다고 자평했다.


해외의 식전주 문화를 접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낯설고도 매력적인 주도를 몇 가지 더 접했다. 이탈리아에는 식전주와 나란히 식후주 문화도 있다. 대표적인 식후주인 그라파(Grappa)는 와인을 만들고 버려진 포도의 껍질과 찌꺼기를 압착한 다음 증류해서 만든다. 작은 레몬을 쭉 짜서 마시는 듯 새콤달콤한 리몬첼로(Limoncello)도 있다. 하여튼 애주가에게 있어 이탈리는 참 사랑스러운 나라다.


서울 내 굴지의 평양냉면집을 들락거리며 '선주후면'이라는 아름다운 문화도 알게 되었다. 뜻을 간략히 풀자면 '술 먼저 면은 그 뒤에' 정도 되겠다. 우리도 있었다. K-식전주 문화. 정갈한 마음과 다소곳한 자세로 선주 후면을 즐기고 있다. 은둔의 평양냉면 고수들에 비하면 소박한 평린이지만 맑은 소주로 코팅한 위장에 받아내는 냉면의 맛은 그 전과는 필시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남편과는 함께 요리를 해서 반주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리를 하면서도 자연스레 '식전주 한잔?'이라며 깔끔하게 떨어지는 와인을 반 잔씩 마시게 되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뭐가 좋냐고 묻는 한 아이에게 술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했는데, 이젠 좀 더 자세하게 말해야겠다.


어른이 되니 식사 초장부터 당당하게 어깨 펴고,
애피타이저 삼아 술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성숙한 여자라면, 일단 마셔보자. 아페르티보!

(기존 발행글을 수정하여 재발행했습니다.)

사랑스러운 이탈리아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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