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사계절이 나눠가진 비중이 온전하지 않아 보인다. 봄,여어어어어어어어름,가을,겨어어어어어어울이 되어가는 듯하다. 올해 여름도 거세다. 더워도 너무 덥고, 앞으로 더 더워질 것 같다. 다행히 커피집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한 나이부터, 여름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난다. 그가 있어 혈중 아메리카노 농도를 잘 맞춰가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어릴 땐 이까짓 더위쯤이야 땀 한 바가지 흘리고 이겨내! 를 온몸으로 외치던 근성 있는 어린이였다. 한 여름에도 놀이터에서 격렬한 얼음땡을 해서 땀으로 속옷까지 다 젖어도 헤헤거리곤 했으니. 그 시절의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라 한다면 아마 죠스바와 스크류바, 빠삐코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1일 1 아이스크림, 주말엔 1일 2 아이스크림도 거뜬했다. 군것질의 전성기를 보내던 시기, 나의 부모님은 꽤 관대한 편이었다. 콜라도, 초코 우유도, 구구콘도 냉장고와 냉동고에 가득 채워주셨는데 유독 안 되는 게 있었다. 바로 '더위사냥'이었다.
설탕을 원 없이 듬뿍 넣은 인스턴트 믹스 커피(일명, 다방 커피)를 얼린듯한 그 맛! 쌍쌍바와 함께 우정 테스트가 가능한 나눠 먹기의 양대산맥으로도 유명한 아이스크림이었다. 어른의 전유물인 커피를 살짝 맛보고 싶을 때 아닌 척 슬쩍 먹어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난 더위사냥을 먹으려면 엄마에게 '한 번만, 한 번만'을 외치며 먹고 싶다고 사정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엄마와 할머니는 '커피를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말을 마치 '문지방을 밟으면 복 나간다'는 말처럼 사용하셨다. 그래서 더위사냥을 먹을 때면 머리가 나빠지는 것을 감수하고 먹기도 했다. 정작 우리 집 어른들은 아침마다 헤이즐넛 커피를 잔뜩 내려 한소끔 식힌 뒤, 델몬트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보리차처럼 수시로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아이고 배야.
더위사냥에서 시작한 커피에 대한 한을 어른이 돼서 풀어볼까 했는데. 슬프게도 나는 카페인 성분의 흡수와 분해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커피를 한 잔만 마셔도 기운이 펄펄 나고, 오후 서너 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밤 12시까지 눈에서 광채가 났다.
아직은 카공족이 없던 그때. 커피는 커플의 전유물이며, 대부분의 카페는 커플들이 먹여 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와 남편이 연애를 하던 시절이 그랬다. 우리도 데이트를 하며 서서히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바리스타라는 말이 알음알음 전파 되어 국제대회에서 수상한 분의 카페를 찾아다녔다. 캐러멜 마키아토와 플랫 화이트를 넘어 이젠 이국적인 지명을 붙인 원두들을 골라 핸드드립으로 시켜 먹는 게 감성 좀 아는 도시인의 덕목이 되던 때였다. 와플과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안주삼아 먹던 커피에서 진짜 커피가 주인공인, 오직 커피만 마실 수 있는 카페들이 도시 이곳저곳에 자리 잡았다.
비록 커피를 하루에 한 잔 밖에 마시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예리하게 맛있는 커피만 찾아다니며 마셨다. 그리고 다행히 남편은 좋은 카페 메이트라 카페 투어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당시 주변 친구들의 남자친구들은 보통 카페에 가면 커피를 원샷으로 때린 뒤 자리가 불편하네, 여기 앉아서 뭐 하네, 지루하네 라며 툴툴거렸다는데. 내 남자는 카페에 가면 나랑 조곤조곤 수다도 잘 떨어주고(한 20분ㅎㅎ), 언제 챙겨 왔는지 야무지게 책도 펼쳐놓고 가만가만 잘 읽는 데다, 깜찍한 사이즈의 이북리더기도 잘 들고 다녀서 빈손으로 다니던 내게 쓰라고 주곤 했다. 서울에 살 때는 덥거나 추우면 대형 몰에서 데이트를 자주 했다. 그곳에 가면 난 "날 풀어줘."라 말하며 방생을 요청했다. 신나게 쇼핑을 하면 그 사이 남편은 용케 맛있는 카페를 찾아서 그날의 날씨와 사정에 맞는 원두를 골라내고 혼자 시간을 잘 보내곤 했다.
결혼을 할 때도 남편은 자신의 혼수품을 챙겨 왔다. 비알레띠라는 모카 포트와 커피 분쇄기 등등 각종 커피 제조 도구였다.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우리 집 커피 담당은 남편이다. 전기밥솥 뚜껑을 열 때 늘 허둥대더니, 커피를 내릴 때는 어찌나 날렵하고 듬직하던지. 비록 모카 포트는 캡슐커피 머신으로 간소화되었지만, 핸드 드립을 위한 원두의 재고 관리도 여전히 남편이 한다. 이젠 커피도, 더위 사냥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남편과 커피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언젠가부터 커피가 달기만 하다. 커피 맛을 알면 어른이 다 된 거라던데. 그렇다면 아직 모른다고 거짓말하고 싶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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