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2
사실 처음 성인이 된 후 내 미래엔 결혼의 자리가 없었다. 남편도 기억한다. 둘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내가 한다는 소리가, '난 결혼은 싫고 그냥 동거만 하고 싶어.'여서 얘는 뭘까 싶었다고 한다. 사랑이 꼭 결혼으로 종결되어야 하는지 한 번 의문을 품으니 사랑과 결혼의 연결고리가 그렇게 느슨해 보일 수 없었다. 남편은 매 순간 일어나는 삶의 모든 변화를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쉬웠다. 둘이 만나면 늘 같이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래서 둘이 된 다음의 삶에 대한 계획은 잔뜩 세우면서도, 결혼식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다. 결혼식? 글쎄. 우리가 같이 사는 사이가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해 줄 양가 가족들과 친구 몇 명만 불러서 함께 밥을 먹는 자리 정도면 되지 않으려나.
그래도 인륜지대사이니 만큼 부모님께 여쭤보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 서로의 부모님께 결혼식에 대한 의향을 여쭸다. 두 집안 분위기가 대체로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였지만, 이번엔 양가 어르신 중 한 분께서 결혼식 사수에 물러섬이 없으셨다. 해서 식을 아예 안 하는 건 어려워졌다. 간소하게 하기 위해 스몰 웨딩을 알아봤으나, '스몰'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둔 복잡 거대한 선택지에 놀라서, 우리는 결국 대한민국 평균에 해당하는 가장 평범한 평범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게 가장 빠르고 편리한 길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다들 그래서 이렇게 결혼을 하는 거였구나.
예비신랑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생각했다.
어디 보자, 우리의 결혼식에서 내쫓을 것이 무엇이 있나!
결혼식의 절차에서 모두 번거로운 것, 오글거리는 것, 우리답지 않은 것은 제외하기로 했다. 바로 이것!
주례사
인생에서 참여한 결혼식이 몇십 번일 텐데, 그중 마음에 남아있는 주례사 한 줄이 없다. 인상 깊은 순간 이 있다면 명동 성당에서 결혼한 가족이 있어 당시 주례를 봐주신 고 정진석 추기경의 말씀 정도. 권위에 기댄 말보다 정말 함께 사는 것에 말씀을 듣는다면 부모님들께 들어야 온당했다. 주례사 대신 아버지가 성혼 선언을 해 주셨고,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쓰신 축사를 낭독해 주셨다. 울지 않으려 애썼는데 큰 위기가 있었다. 선언을 해야 하는 아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목소리는 울먹하셔서 한 번, 문학소녀 출신의 엄마가 심금을 울리는 축사를 쓰셔서 두 번의 고비가 있었다. (시아버지는 너무나 씩씩하고 용감하게 축사를 해 주셨는데 거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시는 듯한 데시벨이라 하객들이 빵 터졌었다.)
신랑의 축가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 모두 함께 축하받는 자리다. 그런데 유독 새신랑이 축가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부를 향한 애정을 과시하는 선곡으로. 평소에도 남편의 노래를 듣는 걸 좋아하지만 우리는 둘이 함께 축하받기로 했다. 축가는 사회인밴드의 보컬을 하는 남편의 오랜 친구가 John Legend의 Ordinary People을, 당시 근무했던 학교의 제자들이 한 곡을 불렀다.
폐백
시아버지의 요청이었다. 사실 시아버지는 강경 결혼식 반대파의 대장이셔서 결혼식을 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셨다. 평소에도 허례허식이나 빈말 같은 뜬구름 잡는 것들에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시곤 했는데, 난 그게 좋았다. 폐백 촬영이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어서 한복을 입고 사진만 찍었다. 어르신들이 챙겨주신 폐백비는 신혼여행 가서 까까 사 먹으라며 시아버지가 착착 걷어서 주셨다. 좋은 어른을 모시고 있는 우리가 복이 참 많다.
꽃그네 입장과 비눗방울, 기타 모든 이벤트
오글 거리는 것 반사. 입장을 할 때 신부를 돋보이게(돋보이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하는 각종 장치들은 모두 거두었다. 종종 친구들이 신랑에게 미션을 주거나 게임을 하게 하는데, 잘하면 분위기가 유쾌할 수 있지만 우리 둘 다 쇼맨십이 있는 타입이 아니라 이 역시 절대 거부. 사회를 보는 친구에게도 결혼 전에 만나 밥을 먹으며 특별히 부탁했다. 부디 어떠한 이벤트도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 줄 것을.
스튜디오 촬영
이것은 결혼 전 준비과정에서 생략한 것이긴 한데 결혼식에 영상이나 액자로 활용되기도 하니. 실내에서 드레스를 갈아입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찍는 스튜디오 촬영을 안 했다. (스드메에서 '스'를 담당하는 그것. 스촬이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대신 결혼을 앞둔 몇 달 전, 서촌에 있는 흑백사진관에 가서 아웃렛에서 산 양복과 흰 원피스를 입고 둘이 손 꼭 잡고 찍었다. 제법 잘 나와서 그런지 그 사진관의 샘플 사진이 되었다. 신혼여행을 가서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님을 모셔 자연스럽게 여행지 이곳저곳에서 스냅사진을 찍었다.
결혼식이 끝날 무렵 여행을 갈 생각에 싱글벙글한 남편과 달리 나는 지겨움을 숨길 수 없었다. 잘 웃고 있다 생각했는데 곁에 다가온 친구가 "야, 너는 표정이 왜 그래?"라고 말해서 내가 한계에 달했구나 싶었다. 이 불편하고도 기괴한 흰 원피스를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다. 하이쿠 작가들은 시를 쓰며 '한 줄도 너무 길다'라고 했다던데, 난 '한 시간도 너무 길다'의 상태였다. 이렇게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던 여자는 결혼 후 매일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듯 하루하루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결혼식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은 어디에 뒀는지도 모르겠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 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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