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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해서 좋은 이유

결혼식2

by 미립

결혼을 해서 좋은 점 삼천오백가지 중 하나는 이제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아내와 백년해로를 꿈꾸는 사천칠백가지 이유 중 하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결혼식을 싫어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낯선 사람들, 어색한 인사와 웃음, 뚝딱거리는 사회자, 지루한 주례, 알아볼 수 없게 화장을 한 신부, 여전히 아이같은데 어른인척 악수를 하는 신랑.

때로는 불안한 음정으로 기어코 직접 축가를 부르는 신랑을 보며 조마조마했고, 이벤트랍시고 손발이 맞지 않는 군무를 추는 친구들을 보며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랐다.

앉을 자리가 없는 예식장 뒤쪽으로 팔짱을 끼고 늘어선 사람들은 예식이 진행되는 말든 잡담을 나누기 바빠서 소란스럽기도 했고, 더 많은 사람이 몰린 결혼식에선 아예 식당에 앉아 희미한 빔 프로젝터 화면으로 예식이 끝나가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길고 지루한 주례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하객들이 보는 앵글에서는 갑자기 신랑이 예식장 바닥으로 납작 엎드려 사라지곤 했다. 나는 그게 늘 우스꽝스러워서 몰래 혼자 웃었다.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며 신랑 또는 신부에게 눈도장만 찍고 황급히 식장을 떠나곤 했는데, 조용한 거리로 나와 예식장의 어지러운 소란이 뒤통수에서 멀어지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결혼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인 후, 우리의 과제는 어떤 결혼식을 할 것인가, 로 옮겨갔다.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보면, 우리의 결혼식은 우리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빼고’, 해야 하는 것에는 최대한 의미를 ‘더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1. 빼기

값비싼 스튜디오 촬영 대신 북촌의 한 사진관에서 셀프 촬영을 했다. 직접 코디한 옷을 입고 흑백사진으로 찍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우리 사진은 그 사진관의 팝업 매장에 걸려있었다.

예물도 폐백도 생략했다. 그리고 주례도 생략했다. 다행히 양가 부모님들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안하겠다는 우리의 의견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것도 우리가 ‘직접’ 하지 않았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도 춤을 추지도 않았다. 서로에게 편지를 쓰지도 않았으며, 갑자기 숨어있던 하객들이 곳곳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벤트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결혼을 충분히 축하받는데에 집중했다.

(특히 우리가 잘했던건, 직접 노래 영상을 찍어 예식장에서 틀자는 최초의 계획을 포기한 것이었다. 녹음실까지 갔다가 그 계획을 포기한 이유는 아내가 한 소설도 채 부르지 못하고 끝없이 웃음이 터졌기 때문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 웃음이 우리의 역대급 흑역사를 막았다.)


2. 더하기

주례를 생략한 대신, 나의 아버지는 성혼선언문을 낭독하셨다. 멋들어진 필기체로 직접 쓴 성혼선언문을 아버지는 담담하게 읽어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편지를 써서 읽어주셨다. 장인어른은 편지의 첫줄을 읽기도 전에 울음을 참느라 입을 씰룩거리셨다. 한동안 더듬거리시다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편지를 끝까지 읽었다. 장모님은 명문을 적어오셨는데, 나중에 예식이 끝난 뒤 나의 회사 여사친들은 장모님의 편지를 듣다가 펑펑 울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축가는 두개였다. 하나는 사회인 밴드 보컬로 활동하는 내 친구였다. 우리가 정한 축가는 John Legend의 Ordinary People이었다. 친구는 명창을 뽐냈는데, 나중에 술자리에서 자신의 축가 역사상 최고의 난이도였다며 내 멱살을 잡았다.

두번째 축가는 아내의 제자들이었다. 당시 아내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아내가 운영하던 동아리의 학생들이 축가를 불렀다. 노래의 중간부터 아이들은 울기 시작해서 노래는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담겼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결혼식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걸 다시 하라고 한다면? 나의 대답은 언제나 NO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게 있다. 가야할 결혼식이 줄었다. 갈만한 지인들은 이미 다 갔고, 아직도 안 간 자들은 '아직'이라는 단어와 슬슬 멀어지는 중이다. 혹시 이 글을 볼만한 지인들 중에 몇 년 내에 결혼식을 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고작해야 한 두명 떠오른다.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솔직해지는 일은 어쩌면 조금은 미안해지는 일이다. 어쩔 수가 없다. 나중에 이 글이 떠올라서 내게 청첩장을 건네기가 머뭇거려진다면... 고맙다. 안주셔도 된다. 마음으로는 응원해 드리겠다. 잘 사시길. 어떤 결혼식을 하더라도, 또는 하지 않더라도, 우리처럼만 잘 사시길.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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