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또 다시 셋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이사

by 미립

이사를 싫어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포장이사 업체들이 일반화되기 전에도 우리 가족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 조금씩 집이 넓어지는 이사여서 늘 분위기는 들떴다. 종이박스를 잔뜩 구해와서 각자 자신의 짐을 직접 담았다. 박스에 내 물건들을 테트리스하듯 차곡차곡 쌓는게 재밌었다. 책이나 일기장을 담다가 무심코 훑어보던 책이 너무 재밌어서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곤 했다. 옮겨간 집에서 다시 짐을 정리하면서 나름의 규칙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이사의 어렵고 불편한 것들을 부모님이 다 해결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이사가 즐거울 수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결혼을 하고 2년마다 전세집을 구해 옮겨다니던 시절에는, 이사를 하는게 참 싫었다. 어린 우리를 은근히 무시하는 집주인에게 지지 않으려 냉정한 척, 다 아는척, 어른스러운 척 해야 하는 것도. 별거 아닌 것들을 부풀려 말하는 공인중개사의 달콤한 언설을 가려내야 하는 것도. 대출이 잔뜩 껴있는 전세자금을 혹시라도 돌려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는 것도 싫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구입한 예쁜 신혼가구들이 한 번씩 옮겨다닐때마다 생채기가 늘어가는 것과 별 문제 없어보이던 보일러가 이사온지 며칠만에 고장나거나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주차공간 부족 문제를 이사온 후에야 알게 되어 퇴근이 늦을 때마다 주차장을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것도 싫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는 새로운 동네에서 좋은 점들을 찾으며 나름 즐겁게 살았다. 저마다 좋은 점들이 있는 고마운 공간들이었다. 서울은 서울이어서, 근교 신도시는 서울이 아니어서 좋았다.


진짜 우리집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집은 예산을 초과하고, 예산을 맞추면 무언가 조금 부족했다. 부족한 걸 감안하고 덜컥 구매하기에는 서울의 집값이 너무 비쌌다. 고민하다가 다시 들여다보면 그 집은 이미 누군가에게 팔리고 없었다.

서울 시내를 지나다닐 때마다 저 많은 아파트들 중에 우리 껀 없다는게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크지는 않아도 구조는 답답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너무 오래되서 여기저기 문제가 생길만한 집은 아니었으면 했다. 초역세권은 아니어도 걸어서 15분 내에는 지하철이 있었으면 했고, 대단치는 않아도 약간의 호재는 있어서 집값이 떨어지지는 않기를 바랐다. 사실 이것 만으로도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우리를 정말 어렵게 한 건, 우리 강아지가 아주 완고한 실외배변견이라는 사실이었다. 스트릿 출신 강아지 무늬는 절대로 집 안에서는 배변을 하지 않았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쳐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배변은 밖에서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에 매일 강아지와 산책할 만한 공원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공원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는 큰 공원은 아니어야 했다. 서울 시내에 그런 아파트는 많지 않았다. 하나의 아파트에게 몇 평 이상의 잔디밭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는 법. 우리는 수십 군데에 임장을 다닌 끝에, 우리의 조건에 딱 맞는 집을 발견했다. 특히 아파트 뒤쪽으로 연결된 기다란 산책로는 사람이 많지 않고 접근성이 좋아서 데일리 산책로로 딱이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결심을 굳혔다.


우리의 기나긴 이사 사가를 끝장내기로.


우리집을 갖게 되었을 때, 가장 좋았던 건 더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집에 몇 년을 살아도 우리를 쫓아낼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음껏 이 동네에 정을 붙여도 떠나면서 아쉬워할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았다. 코로나 시대를 이 집에서 버텨내고 아쉬움없이 공간에 정을 붙였다. 이대로 이 집에서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주'라는 복병이 숨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몇 번의 한달살이를 거쳐 제주 일년 살이가 시작되었고, 아내와 강아지는 우리집을 떠나 제주도에 있는 남의집에 세를 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우리집을 구했는데, 또 다시 셋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에서의 이사도 생각하고 있다. 혼자 살기엔 집이 크고, 직장도 멀어서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구한 우리집인데 남한테 방을 내어주려니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다. 내 인생에 이제 이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던 것 같다. 한 곳에 정착하기에는 아직, 어떤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삶의 모습들이, 나는 여전히 궁금한지도 모르겠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https://brunch.co.kr/@redmanteau/24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