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김정은의 초콜릿> 방청권이 생겼는데, 같이 갈래?"
당시 여사친이었던 아내(이후 ‘지이’라고 칭함)에게 말했다. 그때 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 그 2인용 방청권을 내가 어디서 우연히 주워 오기라도 했나보다, 생각했을까. 아니면 친구인줄만 알았던 이 녀석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시작했을까. 프로그램 사이트에 가서 사연을 적고 방청권을 신청할 때부터 ‘지이한테 가자고 하면 뭐라고 할까? 싫다고 하면 어쩌지?’ 생각했던 나를 알고 있었을까.
아침 8시부터 줄을 섰다. 그런데도 내 순서는 한참 뒤쪽이었다. 대학생인 나보다도 시간이 많은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군가 싶었다. 오전 시간을 다쓰고서야 입장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여사친 지이가 퇴근할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그 때 내가 그 긴 시간 동안 무얼 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서점을 한 군데 들러서 책을 사고 사람이 없는 까페를 찾아 한 두시간을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 장소가 지겨워지면 또 다른 까페를 찾아 또 두어시간 앉아 있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때 이미 나는 혼자 다니기에 익숙한 사람이어서 혼자서 밥도 잘먹고, 까페도 잘갔다. 서울에서 반나절을 혼자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특히 썸사친(이라고 어쩌면 혼자 생각했던)을 기다리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대학생인 나와 달리 이미 3년차 직장인이었던 지이는 방청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공연장을 향했다. 또다시 줄을 서고 순서를 기다려 콘서트홀에 들어갔다. 내가 받은 번호표는 입장 순서였지 좌석이 지정된 건 아니었다. 뒷번호여서인지 이미 자리는 가득 차 있었다. 자릿수보다도 많은 사람을 받은건지 앉을 곳이 없어 보였다. 자리가 없으면 돌아가야 하는 건가, 쉽게 포기하는 타입인 나는 벌써 낙담하기 시작했다.
그때, 지이는 내 손목을 잡더니 앞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자리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 앉아도 되죠?"
지이는 좌석을 안내하고 있던 현장 스태프에게 좌석과 좌석 사이의 넓은 복도 계단을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다. 중앙에서 조금 왼쪽에 위치한 앞쪽 복도 계단이었다.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스태프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우리에게 말했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처음 지이가 가리킨 복도 계단은 그때부터 또다른 좌석이 되었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뒤로 쪼르르 복도 계단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좌석수보다 입장한 관객이 많은 공연장에서는 원래부터 그렇게 복도 계단이 좌석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것처럼. 지이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상황을 보고 순간 그렇게 판단할 걸까.
아, 멋있다.
그때 나는 지이에게 반했다. 지이의 얼굴과 목, 어깨라인 뒤로 옛날 화가들이 그린 예수나 부처의 그림처럼 동그란 후광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지이는 그저 자리가 생겼다는 기쁨에 보조개를 깊게 만들며 생글거리고 있었을 뿐인데도.
몇 주전에 프로그램 사이트에 가서 사연을 적고 방청권을 추첨받아 아침부터 줄을 서고 반나절을 기다려서 입장하고도 자리가 없어보이니 나는 금방 포기하고 나가버리려 했다. 그런 나와 달리, 지이는 나의 손목을 잡고 없던 자리를 만들어냈다. 내가 못 가진 순간의 판단력 또는 추진력은 내가 지이에게 느끼는 심쿵 포인트였다.
그 날, 우리는 앞자리 복도 계단에 앉은 덕에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클래지콰이, MC몽, 2NE1의 라인업이었고 공연 자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클래지콰이 공연 때는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MC였던 김정은배우가 객석으로 올라왔는데, 내 옆으로 와서 어깨동무를 하고 공연에 맞춰 점프를 했다. 그 장면은 방송에도 그대로 나왔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공중파 TV 출연이었다.
사실 지이에게는 조금 미안할 때도 있다. 지금도 나는 당황하면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지이를 쳐다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의 눈이다. 그럴 때를 생각하면 우리 강아지와 나는 별다를 게 없다. 지이는 거대한 벌레가 나타났을 경우를 제외하면, 척척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리고 나는 그 때마다 또 지이에게 반한다.
결국 대형견 하나와 소형견 하나를 키우게 된 지이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미안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남은 우리의 인생(및 견생)에서도
나는 지이에게 반할 일 투성이일 것이므로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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