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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은 둔한 놈이 이기는 게임

청소

by 미립

청결함에 예민한 편이다. 어릴 땐 약간의 결벽증도 있어서 친구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땐 내 숟가락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추구하는 청결함이라는 것은 그 대상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오직 나'로 한정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내 몸 하나만 깨끗하면 되는 아주 이기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십대 초반, 친구와 둘이 자취를 했다. 그 친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청결함에 대한 허들이 매우 낮은, 거의 세상 모든 지저분함에 대해 매우 쿨한 태도를 가진 극테토남이었다. 그 때 친구와 나는 그 조그만 원룸을 최대한 지저분하게 방치했다. 마치 집 안치우기 대결을 하는 사람들처럼.


원룸 주제에 세탁기는 있어서 그래도 빨래는 자주 했는데, 문제는 건조기가 없던 시절이라는 점이었다. 한층만 올라가면 옥상이었고 그 곳엔 건조대가 있었지만 그 때 우리에게는 그게 너무 멀어보였다. 축축한 빨래는 원룸 바닥에 던져졌고 하루 이틀 지나면 어떻게든 말랐다. 꼬깃하게 마른 옷들은 킁킁 냄새 테스트를 통과하면 그 날의 룩이 되었다. 냄새가 날 경우엔 다시 세탁기로 던져졌다. 바닥에 널린 빨래가 많은 날에는 원룸이 발 디딜 틈없이 가득 찼다. 그럴 땐 발로 슥슥 밀어서 화장실이나 책상까지의 주요 스팟까지 가는 길만 만들고 대충 또 며칠을 살았다.



아내는 내가 그런 놈이었는 줄도 모르고 덜컥 결혼을 했다. 속았다는 말을 몇번이나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자친구로 만난 나는 늘 깨끗했으니, 그 남자의 깨끗함이 신체 기준 영향 범위 10cm라는 걸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결혼생활이라는게 그렇다. 둔한 놈이 이기는 게임이다. 화장실 타일 사이에 핀 곰팡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승자다. 나와 함께 위너스 클럽을 결성할 수 있다.


십년 간 속았다는 말을 반복하던 아내는 결국 제주도로 도망을 갔다. 나와 단둘이 남겨진 서울집은 금세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욕조에는 물때가 생겼고 세면대 배수구에는 까만 띠가 생겼다. 싱크대에서는 이게 뭔가 싶은 신기한 냄새가 났고 날이 습해지자 금방 바닥이 끈적거렸다.


내가 시원하고 깨끗한 대기업 사무실에서 일하는 척 눈알이나 굴리고 있는 동안 우리집 우렁각시가 얼마나 부지런히 이 집을 가꾸어 왔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어쩌면 노동의 총량은 나보다도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돈이라는 보상을 핑계삼아 나 혼자 징징거려왔던 걸지도.


사실 나는 여전히 내 몸만 깨끗하면 되는 사람이라 아내가 없는 서울집을 열심히 닦고 문지르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내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화장실과 싱크대가 주요 타겟인데 최근엔 침구류까지 범위를 넓혔다.
“혼자 사니까 집이 엉망이구나."라는 말을 듣는 건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게 맞으니까. 하지만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 온 아내가 조금은 덜 바빴으면 좋겠다. 한두주 머무르다 가는데 매일 청소만 하다 갈 걸 생각하니 그게 너무 싫었다.


그렇게 결혼 십년만에 청소를 배우고 있다. 가끔 재밌을 때도 있다. 풋샴푸를 대충 칙칙 뿌리고 버릴 예정인 샤워볼로 쓱쓱 문질렀는데 화장실이 금방 깨끗해졌을 때. 어라, 청소하니까 기분이 좋다? 이때가 긴장할 때다. 결혼생활 위너스 클럽 멤버십을 유지하려면 둔한 놈 포지션을 잃으면 안되니까.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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