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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우산을 잃어버렸어요

노래

by 미립

J가 그 대학교에 1학기 수시합격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때 나는 한창 연애중인 고3이었고, J는 나의 첫 여자친구의 절친이었으며, 내 절친의 사촌누나였기에 ‘여러 갈래로 엮인 지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았다. 수능을 보고 나도 그 대학교에 합격 통지를 받은 이후에도 메신저에서 몇 번 대화를 나누었을 뿐 J와 깊이 친해질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J와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2년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그때도 별다른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릴적 내가 J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조금은 새침한 서울 깍쟁이(실제로 우린 수원 사람들이었지만)에 가까워서 왠지 모를 거리감도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 설명회가 열렸던 곳은 그 학교의 가장 큰 강당이었다. 나는 조금 늦어서 황급히 강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만큼 북적였다. 오른쪽 끝, 또는 거기서 한칸 왼쪽으로 다섯 걸음 정도를 내려가니 빈자리가 하나 보였다. 그곳에 앉으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낯이 익었다. J였다. 그리 친하지는 않은 어색한 사이였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수백명 모인 곳에서 단 한 사람의 지인이 있다는 게 그때는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내가 조금 일찍 왔거나, 혹은 J가 조금 늦게 왔다면 거기서 그렇게 만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인연인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J와 나는 생각보다 금방 친해졌다. 어릴 적에 새침해 보였던 그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J는 잘 웃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공기반 소리반에 맑은 물기를 더한 촉촉한 목소리를 가졌다. J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세상의 굴곡에서 어떤 좋은 면을 발견하고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뭉툭한 사람들과 대충 뒹굴며 살아온 나는 J가 놀랍고 신기했다. 어쩜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이 많을까.


음악얘기, 영화얘기, 우리가 함께 아는 친구들 얘기. J와 나눌 대화의 주제는 끊이지 않았다. 1000문 1000답을 작성해서 서로 바꾸어 보기도 했는데, 비슷한 답을 보면 반가워서, 다른 답을 보면 신기해서 웃었다. 이 사람을 한 겹씩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우리는 시간을 맞춰 함께 학교를 나왔고, 함께 지하철을 탔다. 함께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둘이 옆 자리에 앉기 위해 한 대를 먼저 보냈다. 집으로 가는 2시간 내내 대화를 이어갔다. 즐거웠다. 지하철이 시끄러워서 조금 목소리를 키우고 얼굴을 가까이 기울여 이야기하는 것도, 조용한 버스에서 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다.


대화는 두 시간으로 모자랐다. 우리는 나와 J의 집 중간에서 내렸다. 나는 J를 바래다주며 J의 집 쪽으로 함께 걸었다. 최대한 천천히, 느릿느릿 걸었다. 그래도 J의 집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J의 집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J가 아파트 로비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좌우로 흔들고 있지만 J에게는 어서 다시 돌아오라는 손짓처럼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 보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J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를 돌아 온 길을 다시 걸었다.


오십걸음, 백걸음 쯤 걸었을까. 뒤에서 J가 나를 부르며 뛰어왔다.

“미립아, 잠깐만!”

헥헥거리며 다가온 J의 손에는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가 있었다. J는 선물이라며 내게 그 상자를 건네주었다. 택배 상자를 뜯으니 앨범이 있었다. 앳되 보이는 백인 소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세피아톤의 앨범 자켓 사진이 보였다. 델리 스파이스의 <Espresso>였다.

“나 이거 두개 있어서, 하나 너 주려고.”

J는 두 볼에 보조개를 깊게 그리며 웃었다.



나는 그 앨범을 참 많이 들었다.

앨범의 어떤 노래를 들어도, 나는 금세 스무살의 휘청거리는 소년이 된다.


<고백>은 사실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그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영화 클래식의 분위기가 떠오르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을 들으면서 대학로 밤거리를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약간의 술냄새가 느껴진다. <저도 어른이거든요>를 들을 땐, 어른이고 싶지만 어른스럽지 않은 내 자신을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나를 떠올리며 공감했다.


J와의 관계가 잘못 손으로 문대어 흐릿해진 밑그림을 남긴 채, 가끔 만나는 친구 사이로 정리된 후에는 한 동안 <처음으로 우산을 잃어 버렸어요>를 반복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어딘가에 있을 내던져진
우산에 지나지 않아
비속에도 버려진 검은 우산처럼
오히려 하늘을 보기에
추억만 담고 있잖아
누군가 손을 내민대도
내리는 이 비를 막을 자신은 없어


몇년 후, 나는 J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몇년 후 결혼을 했고, 몇년 그리고 조금 더 후에는, 주말부부가 되었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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