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때는 우리가 열심히 사랑하던 시절. 우리들의 사랑의 역사로 따져보자면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황금기이자 호시절이었던 듯싶다. 온종일 데이트를 한 뒤에도, 미처 다 전하지 못해서 맴도는 마음이 있었다. 그날 만들어진 마음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당일 배송하고 싶었다. 내일은 또 내일의 모양을 한 새 마음이 잔뜩 만들어질 테니. 데이트를 마친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늘 그렇듯 별거 아닌 말들을 메시지로 주고받았다. 자주 하던 이야기는 ‘지금 무슨 노래 들어?’였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어폰을 나눠 끼고 같은 노래를 들었다. 함께 봤던 영화의 OST일 때도 있고, 둘 다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일 때도 있었다. 때때로 ‘이 노래 들어봤어?’라며 서로에게 추천하는 노래도 있었다. 노래로 ‘함께’할 때, 대화를 섞는 것 이상으로 마음이 가다듬어졌다. 그래서 금방 헤어졌는데 그가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지 궁금했다. 남편이 대답한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은 뒤 들어본다. 이것이 그가 나와의 데이트를 마친 뒤 집에 돌아갈 때의 마음이구나 어림잡아 본다. 노래에 담긴 은유를 알아보려 가사에 집중한다. 가사에 ‘보고 싶다’와 비슷한 구절이 있으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남편은 이승열과 넥스트, 특히나 신해철을 좋아했다. 노래방에 가면 늘 저 세 아티스트의 노래를 돌아가며 불렀다. 대화에서도 신해철이 한 말이나 그가 쓴 가사를 인용하곤 했다. 그가 진행하던 심야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을 듣느라 잠을 설쳐서 키가 안 자랐다고 툴툴거렸는데, 왠지 행복해 보였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남편과 유년기를 보낸 친구 예닐곱 무리, 속칭 ‘영통(수원에 있는 동네 이름)들’도 강성 해처리스트(신해철의 모든 것 추종자라는 뜻으로 내가 방금 지었다.)였다. 우리의 신혼집 집들이에 와서 자리 끝물에 넥스트의 노래를 듣다가 한 명씩 서서히 소파에 늘어졌다. 테이블 아래 바닥에 누워 울먹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애도 있었다. 아마 그들 중 누군가는 살짝 울었던 것도 같다. 모두 취했고, 우린 어렸고, 밤은 깊었다. 음악을 듣다 친구들 앞에서 우는 것쯤은 하나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때였다.
나는 장르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꽂히면 듣고 파헤치는 헤비 리스너(Heavy Listener)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다양한 장르의 LP와 CD를 수집하신 덕에, 어린 시절 동생과 둘이 거실의 전축에 자주 들러붙어 있었다. Olivia Newton-John의 'Let Me Be There'을 들으며 메인 음보다 낮게 깔리는 코러스를 들리는 대로 따라 하며 놀았다. 이문세의 노래 '그녀의 웃음 소리뿐'에서는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가 웃겨 그 부분을 자꾸 돌려가며 듣고 까르르거렸다. 양희은에서 Elton John, <Sound of Music OST>에서 어니언스, 룰라에서 Simon & Garfunkel로 자유롭게 이동하곤 했다. 그래서 취향이란 게 뭔지 알게 된 즈음부터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거쳐 패닉과 이승환에 머물다 한국 힙합도 오래 즐겼다. 배철수 아저씨의 라디오를 들으며 팝도 기웃거렸고, 남무성 평론가의 글이 인도하는 대로 재즈와 빅밴드에도 오래 머물렀다. 임용고시 재수 시절엔 K-pop에 흠뻑 젖어 들기도 했다.
취향이 다른 우리들을 묶어준 두 장르는 극과 극에 서 있는 발라드와 아이돌의 노래들이었다. 뻗어 나온 가지의 시작은 전람회 였다. 93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들의 1집에 신해철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남편은 그 연결고리를 타고 합류했었고, 난 3살 위 언니 덕에 중학교 시절 윤상, 윤종신, 이승환 등 소위 먹물 발라더들이 이룬 고고한 물결에 몸을 맡긴 상태였다. 그 씬에서 김동률의 이름을 주워듣고 전람회 1집을 들었는데, 예술이었다. 아쉽게도 전람회가 남긴 앨범은 3개가 전부였지만, 김동률이 이적과 만나 카니발이 될 줄이야. 카니발의 유일한 앨범 <Carnival>은 두 가수가 은퇴한 뒤에도 정규 앨범을 포함해도 걸작이자 명반으로 거론될 만큼 훌륭하다. 타이틀곡은 ‘그땐 그랬지’지만 리메이크 버전이 유명해져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노래는 ‘거위의 꿈’일 것이다. 우린 전람회의 서동욱, 패닉의 김진표가 참여한 ‘그녀를 잡아요’를 들으며 각 보컬의 특성을 살려 따라 부르곤 했다.
우리는 함께 ‘참 어렸고 뭘 몰랐던’ 시절을 넘어 ‘꿈도 꾸지 못할 짜릿한 자유’를 느꼈고, 때론 ‘거친 파도 같은, 거품처럼 흩어지는’ 세상의 냉대에 맞서 서로의 ‘허기진 마음’을 위로했다. 이제는 ‘언제나 숨이 찰 때면 쉴 곳’이 되어주며, ‘삶의 끝에서 웃을 그날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카니발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여 씀-
2000년 후반에 딱 한 번 카니발 콘서트가 있었고, 2015년 김동률의 솔로 콘서트에 이적이 게스트로 다녀갔다. 그리고 9년 후인 2024년 이적의 콘서트에 김동률이 전회 게스트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적과 김동률은 카니발 앨범을 준비하며 음악적 견해가 좁혀지지 않아 참 많이 싸웠단다. 그래서 여전히 친구이자 음악적 동료로 관계를 돈독히 맺고 있지만, 일로는 엮이기 싫다는 속내를 여러 곳에서 오랫동안 밝혀왔다. 하지만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남몰래 바라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카니발 디너쇼. 다 함께 늙어가는 사이니만큼 그들도 언젠가 뜨거운 젊음을 보낸 이들과 한데 모여 그 시절을 추억하며, 또 함께 노래하고 싶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며 남편에게 건강관리를 잘하라 일러두었다. 왜냐 묻기에 우린 비록 효도 공연을 보내줄 자식은 없지만, 열심히 벌고 모아서, 건강한 상태로 카니발 디너쇼 보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로 이적과 김동률, <카니발>의 디너쇼 기원 1일 차다. 우리의 젊음과 추억, 사랑, 우정, 기타 등등. 좋은 것들은 모두 그들의 노래 안에 봉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