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난 아마 수면과 관련한 질환을 가졌을 것이다. 오랫동안 잠과 척진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잠들기’를 어려워하는 것. 잠들지 못하면 몇 시간이고 맑은 정신으로 그날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버릇이 있다. 유독 강렬한 사건을 겪거나 인상적인 체험을 한 날은 밤이 오는 게 두려웠다.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끄고 눕는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새로운 일을 하거나 낯선 사람을 한 번에 많이 만나야 하는 일정을 겪는 날은 실은 낮부터 걱정이었다. 아마 오늘은 잠들기 어려운 밤이겠구나 싶어서.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처음 내 방이 생겼다. 그리고 그 무렵, 모두 잠든 시간에 홀로 잠들지 못한 자에게 찾아오는 적막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밤은 사물의 시간이다. 그들은 몸 가장자리에 어둠을 묻힌 뒤, 나에게 묻는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느냐고. 질문이 가장 많았던 사물은 방문 옆에 걸어둔 벽시계. 낮에는 조용했던, 혹은 다른 소리에게 양보했던 그의 초침 소리가 밤만 되면 베개를 타고 흘러 귓전에 고이는 날이 종종 있었다. 시계를 빼서 무릎 담요로 둘둘 감은 뒤 거실의 소파에 던져두었다, 아침이 되면 되찾아 다시 방 벽에 걸어두곤 했다. (배터리를 뺐으면 될 것을 왜 몰랐을까.)
대학교 때는 친구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꽤 많은 나라를 짧게 도는 일정이기에 사나흘마다 숙소를 옮겼다. 원룸형 비즈니스호텔 방에는 무릎 혹은 허벅지 아래까지 오는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연식이 오래되거나 낡은 냉장고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 들렸다. 그 소리는 세상의 소리가 음소거가 되는 밤이 되면, 때때로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보다 더 커졌다. 조용히 일어나 냉장고를 앞으로 당긴 뒤 벽 뒤쪽콘센트에 꽂힌 코드를 뺐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사슴이었고, 그때의 강렬한 기억이 몸에 남은 걸까. 잠들기 어려운 밤을 예감하면 같은 시간, 숲속 어딘가에 사는 초식 동물을 떠올렸다. 주위에 도사린 포식자로부터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편히 누워 자는 것을 포기하고 기꺼이 서서 자는 기린과 말과 코끼리 무리. 그들이 맞이하는 숱한 밤에 비하면 나의 밤은 훨씬 안전한데 나는 쫓는 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한번 물꼬를 튼 거친 상념은 어둠이 소외한 빛의 영역을 벗어난 지 오래라 더욱 짙고 깊어졌다. 잠들지 않으면 늘 깨어있을 수 있다. 지금 잠들면 내일 못 깨어날 수도 있는 거구나. 취약한 생각은 어둠 속에서 물 없이 꿀꺽 삼키자. 이 고요 속에 숨어있다 해가 올라오면 빛인 척, 밝은 척하자. 이런 식으로 나는 종종 잠과 거래를 했다. 잠을 포기하는 대신 마음의 안정을 찾는, 대단히 손해를 보는 어느 멍청이의 거래.
남편은 언제 어디서나 잘 자는 사람이다. 언제나 ‘레드선’ 하고 최면에 걸린 듯, 이제 잘게를 말한 뒤 1~2분 뒤면 잠자는 이의 숨소리를 낸다. 믿을 수 없어서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데, 정말 한결같이 늘 잘 잤다. 그는 내가 작은 소리를 신경 쓰느라, 잠자리가 변하면, 많은 일이 있었던 날 잠재우지 못한 각종 고민을 머리에 이고 있느라 잠들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혼자만 잘 잤다. 물론 새벽에 깼는데 잠들지 못한 날 잠결에 보고는 걱정을 해줬지만 그러고는 30초 뒤 바로 잠들었다. 잠의 세계는 냉정하다. 잠은 사랑하는 사람도 절대 대신해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곤히 자는 남편의 오르락내리락하는 배, 잠자는 이 특유의 숨소리가 나의 숙면을 찰지게 도왔다. 한결같이 꿀잠을 자는 이가 조성한 잠의 무드는 자장가요 수면제였다. 그는 잠버릇이 없는 게 잠버릇이었다. 이를 갈지도, 코를 골지도, 몸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정말 열심히, 충실히, 그리고 가만히 잠만 잤다. 매일 밤 ‘잘 자기’의 산증인, 표본을 곁에 모셔두고 잠드는 듯했다. 그가 뿜어대는 충만한 잠의 아우라에 휩쓸리듯 눈을 감고 일어나면 아침인 날이 많아졌다.
이제는 윗집에서 누군가 걷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서던 내가 주말이면 낮잠도 잔다. 사실 우리 부부는 평일에도 그러려 노력하지만, 주말이면 둘의 취침과 기상 시간을 또렷하게 맞춘다. 잠의 양을 맞추는 것이다. 아침이면 누군가 먼저 일어나도 조용히 누워있다가 상대가 일어나면 같이 일어난다. 예전 글에도 쓴 적 있지만, 저녁에도 각자 할 일을 하다가도 잘 때가 되면 눕는 시간을 정해놓고 침대에서 만난다. 그 덕에 잠들기의 강한 명분이 생겼나 보다.
나도 열심히, 충실히, 그리고 가만히 잠만 자는 사람이 되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불면의 밤과 조우하고, 불안이 피운 작은 불씨가 안온함의 들판을 밤보다 까맣게 태우는 새벽도 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어 나아졌다. 어쩌면 오늘보다 내일은 잘 잘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을 만한 낙관적인 밤이 내게도 여럿 생겼다. 열심히, 충실히, 그리고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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