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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nap ever!!!

낮잠

by 미립

시트콤 <프렌즈>를 참 좋아했다. 영어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열 번은 본 것 같다. 이제는 에피소드 초반 10초만 봐도 그 에피소드의 모든 내용이 기억날 정도다. 좋아하는 많은 장면들이 있는데, 조이와 로스가 소파에서 함께 낮잠을 자는 이 장면도 그 중 하나다. 시즌 7의 여섯번째 에피소드 <the one with nap partners>에 나오는 장면이다. Best nap ever!!는 이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나의 최고의 낮잠을 생각해봤다. 생각하니까 금세 졸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주도 이층집에서 바로 얼마전과 그 일주일 전, 그리고 그보다 또 일주일 전에도 최고의 낮잠을 잔 것 같다. 거의 매주 Best nap을 경신 중이라 해도 무방하다.



나는 식곤증이 있는 편이라 점심을 양껏 먹던 먹보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시에스타가 없는게 늘 아쉬웠다. (요즘은 식사량은 조금 줄여서 식곤증이 많이 줄었다. 그러고 보면 식곤증의 원인은 그저 과식에 의한 혈당 스파이크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하고 2시 즈음 너무 졸릴 때는 회사 화장실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다행히 전 직장 화장실은 고급 호텔 수준으로 깨끗해서 낮잠을 자기에 딱이었다.


아내와 연애를 할 때,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한 동안은 나의 졸음이 우리 일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노는 날의 아내는 수상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데이트도 여행도 시간 단위로 촘촘한 일정이 짜여 있었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타고난 소식좌이면서도 먹고 싶은 건 많아서 끝장나는 맛집들을 일정 곳곳에 절묘하게 배치했다. 1인분도 다 못먹으면서도 여러가지 메뉴를 맛보아야 한다며 서로 다른 음식 두 개에 곁들임 메뉴까지 추가했다. 아내가 몇 입 먹다 남긴 음식들은 다 내것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음식을 남기지 못하는 못된 습관이 있었다. 배불리 먹고 나면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낮잠의 기회는 없었다. 놀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동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아내는 놀리면서 웃었다. 그러다 때로는 너무 졸려하는 나 때문에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아내는 아쉬워 보였다. 그럴만했다. 그 여행 또는 그 데이트를 위해 아내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계획을 짰기 때문이었다. 더 재밌게 놀겠다는 의지로.


종종 다투는 경험까지 쌓이면서 우리가 하루를 즐기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져갔다. 이제는 휴일이나 여행 때 하루 종일 촘촘한 일정을 만들지 않는다. 오래 남는 명곡처럼 잡아당기는 구간과 느슨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구간을 교차한다. 보통은 이런 식이다.


유명한 아침형 커플인 우리는 보통 이른 아침, 여름엔 거의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하루를 시작한다. 세상이 뜨거워지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몰려나오기 전에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끝낸다. 강아지의 아침 식사와 산책, 우리의 아침 식사 그리고 까페에서의 평화로운 시간, 때로는 약간의 쇼핑과 해안 도로 드라이브, 어떨 땐 이른 등산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가 거쳐간 곳들에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면 첫 번째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이제 낮잠을 잘 시간이다.


언젠가부터 잠깐동안의 낮잠은 우리가 함께 하루를 보내는 중요한 루틴이 되었다. 나와 아내가 침대에 누우면 강아지는 총총 걸어와서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또는 우리가 눕기도 전에 먼저 침대 한 가운데를 차지하기도 한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누워서 오후의 두 번째 하루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각자 휴대폰을 보다가 금세 잠이 든다. 제주도 이층집의 낮은 어느 세상보다도 조용하다. 놀이터에서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도, 크게 엔진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오토바이나 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바람 소리, 보통은 섬휘파람새와 직박구리가 지저귀는 소리가 몽롱한 잠결에 들려온다.


내일은 또 제주도 이층집에서 최고의 낮잠 기록을 다시 쓸 예정이다. 비가 조금 온다고 했으니 날이 흐리고 지붕과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면 유투브에서 <10분 이내 수면 백색소음 빗소리 ASMR>을 틀어놓은 것처럼 스르륵 잠이 들 것이다. 그러다 잠깐 깨면 오른쪽에 복슬복슬한 내 강아지를 쓰다듬을 것이다. 아내가 인스타 스토리의 음악을 고르는 소리가 들리고 안정감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 다시 잠이 들 것이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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