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아내와 서울 시내 데이트를 하면 종종 차를 두고 집을 나설 때가 있었다. 서울 시내는 주차가 어려운 데다, 이른 아침이나 아주 늦은 밤이 아니면 평일이든 주말이든 늘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내에서 밥을 먹다가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어지면 차가 없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제주와는 달리 서울 시내 어디든 대중교통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으니 차가 없어도 못가는 곳은 없었다.
버스파인 아내와 지하철파인 나는 항상 의견이 갈렸다. 아내는 십분이 더 걸려도 버스, 나는 십분을 더 걸어도 지하철이었다.
내가 지하철을 좋아하는 이유
지하철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정해진 시간에 출발한다. 가끔 1~2분 정도는 늦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일정한 간격에 맞춰 와야 할 열차는 반드시 온다. 그리고 길이 막혀 시간이 늘어나는 일도 없다. 30분이 걸리는 곳까지는 30분이면 간다. 기껏해야 오차는 5분 이내다. 파워 J인 나에게는 계획된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없다. 목적지까지 가는 데에 30분이 걸릴지 50분이 걸릴지 알 수 없다면 그 때부터 불안함은 시작된다. 늦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경우여도 마찬가지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초조하게 한다. 5분 뒤에 올지 10분 뒤에 올지 기다려봐야 알 수 있는 버스를 정류장에서 마냥 기다리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길이 막혀서 서울 시내 한복판에 한참을 서 있을 버스를 떠올리면 오늘 하루는 이렇게 망하는 구나 싶다. 게다가 버스를 한번이라도 갈아타야 하는 경우엔 내리는 정류장과 타야 하는 정류장을 헷갈려서 엉뚱한 곳에서 한 동안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을 좋아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산책하던 임마누엘 칸트같은 안정감이 좋다. 계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예상대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편안함을 느낀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검은 터널과 스치듯 지나가는 타인들의 잔흔 뿐이더라도.
아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
아내는 변화를 좋아한다. 걸어서 동네 맞집에서 저녁을 먹고 올 때에도 가는 길과 다른 길로 돌아온다. 이제는 웬만큼 제주를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새로운 곳을 찾아다닌다. 마치 RPG게임의 검은 맵에 불을 밝히듯 제주 전체를 환하게 밝힐 기세다. 아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버스를 타면 창 밖으로 서울 시내 곳곳을 구경할 수 있다. 지난 번에 차를 타고 지났던 길에는 뭐가 새로 생겼는지, 몇년 전에 데이트를 했던 동네 맛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와 최근에 리모델링한 백화점 건물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많이 타는 차, 심지어 일요일 오후 두시에는 얼마나 길이 막히는지도 궁금해한다. 버스가 10분 늦게 오거나, 평소같으면 30분이면 갈 거리를 45분 만에 닿더라도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변화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얼른 다른 대안을 찾는다. 그러니 버스의 불확실성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다. 앞뒤 좌우로 흔들거리는 버스처럼 우리의 하루가 휘청거려도 담담하다. 그저 그 상황에 스트레스 받아하는 나를 신경쓸 뿐이다.
아직도 나는 버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추석 때는 버스를 타고 부모님댁으로 내려갔다. 편도 삼만 팔천원의 프리미엄 버스는 거의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으로 좌석이 편했다. 큼지막하고 푹신한 의자는 거의 180도 가까이 젖혀졌고 자리마다 커튼이 있어서 독립된 공간이 확보되었다. 어지간한 노트북 모니터만한 화면은 스마트폰 미러링도 되어서 3~4시간은 지루함없이 타고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걸 택할 것 같다. 버스는 예정된 3시간 10분을 훌쩍 지나 4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류장으로 마중 나온 아버지는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본 아들에게 마냥 미소만 보내셨지만, 나는 미안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답답했다.
역시 버스는 나와 안 맞아. 속절없이 도착 예정 시간이 늘어나는 걸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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