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
계절의 변화에 둔감한 편이다. 여름이 존재감을 마구 드러낸 뒤에야 반바지를 꺼내고, 아침 저녁으로 목이 시릴만큼 찬 공기가 흔해진 후에야 자켓을 입기 시작한다. 아내는 함께 외출 준비를 하다가 심심치 않게 이런 말을 한다.
“그 옷은 계절감이 안 맞아.”
요즘은 알람 소리에 깬 뒤에도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십분 정도를 뒤척였다. 아예 30분 뒤 알람을 맞춰 놓고 다시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한 아침형 인간이어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이 깨던 평소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잠을 자도 뭔가 피곤하고, 피로가 풀리지 않는 느낌이어서 잠이 부족한가 싶었지만 스마트 워치는 나의 수면 시간이 충분하다며 “Good!”을 외쳤다.
해가 채 뜨지 않은 아파트 단지를 나서는 출근길에 낯선 한기가 서려있어 놀랐다. 그제야 요즘 아침잠이 늘었던 이유를 알았다. 잠자리가 추웠던 것이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 갑자기 추위가 찾아왔다. 제주에서 김포행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그 날은 비행기가 연결되지 않아,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반팔 티셔츠 위에 얇은 대님 셔츠 한 장을 입고 있었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떠나있던 열흘 동안, 이렇게 서울이 추워졌는 줄은 몰랐다. 그 날 잠이 들기 전에 아침에 추웠던 것이 생각나 급하게 담요 하나를 꺼냈다. 반려견 무늬가 특히 좋아했던 무늬의 애착담요였다.
이미 추워진 가을 날씨에 비해 담요는 조금 얇았다. 하지만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할 일이 참 많았다. 저녁을 차려 먹어야 했고 설거지를 해야 했고 어떤 날은 빨래를 했고, 그러고 나면 다음 날엔 그 빨래를 개야 했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 왔다. 분명 아침에는 ‘담요가 조금 얇아’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불을 찾는 일은 너무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얇은 담요를 다시 덮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잠이 깨면 이상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어깨가 오들오들 떨렸다.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졸린 채로 출근 준비를 했다.
원래 환절기란 이런 건가. 출근길과 잠자리가 추워서 오들오들 떨리는 거였나.
아내와 나는 늦여름에 연인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찬 바람이 살랑거리면 설레이곤 했다. 여름엔 참아왔던 저녁 산책을 하고, 서울 시내 데이트도 하면서 가을을 즐겼다. 환절기가 되면 나는 재채기도 하고, 장염도 곧잘 앓았지만 그래도 출근길에 추워서 발걸음이 빨라진다거나, 오들오들거리면서 잠을 잤던 기억은 없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환절기는 아내가 책임지고 있었다.
“내일은 춥대. 두껍게 입어야 해.”
“그건 너무 얇아. 이걸로 갈아입어.”
내 출근룩의 두께는 사실상 아내가 결정해왔다. 바뀌는 계절에 앞서 스웨터를 사고, 머플러의 개시 시점을 알려주는 것도 아내였다. 그리고 자려고 누우면 어느샌가 이불은 그때의 온도에 맞게 두툼한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 가족의 계절 관리 담당을 제주도에 놓고 온 뒤에, 다시 찾아온 가을의 냉기를 느끼며 아내의 부재를 실감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집에 오리털 이불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고, 보일러를 켜는 법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러다 덜컥 겨울이라도 오면, 그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내의 빈 자리가 유난히 커 보이는 올해의 환절기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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