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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사친과 빨간 입술 티셔츠

by 미립

나는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아내(이후 '지이'라 칭함)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그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지이는 내가 입고 나온 옷들에 대해 한번도 가타부타 얘기한 적이 없었다. 나의 패션이 물음표 투성이였을텐데도 그랬다. (실제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그려진 옷도 있었다.) 대신 함께 쇼핑을 다니며 옷을 골라주고, 길을 가다 보이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의 옷이 예쁜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말하곤 했다. 같이 예능을 보다가 “박명수는 옷을 참 잘 입는다.”든가 “오늘 유재석이 쓴 모자가 너무 예쁘다.”며 슬쩍 구매 링크를 보내주는 식이었다. 덕분에 서른 이후로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여전히 옷 잘입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적당히 섞여서 묻어갈 정도는 되었다.



지이와 나는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다. 한 해에 한 두 번 정도 만나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연애 상담을 하기도 했다. 둘 다 부지런하게도 빈틈없이 연애를 해서, 우리는 만날 때마다 ‘각자 연애중’이었다. 그러다 우리의 연애 공백이 겹치는 시점이 생겼다. 한창 뜨겁던 여름이 이제 조금씩 힘을 빼고 그 열기를 가라앉히던 때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회를 가기로 했다. 평일 저녁이었다. 지이는 일을 마치고 오는 일정이었고, 나는 수업이 없어서 약속을 나가기 전까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한나절 중에 절반은 오늘 무슨 옷을 입을까만 고민했던 것 같다. 아직 날이 더우니 반팔이어야 했는데,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집에 있는 반팔 옷을 죄다 꺼내서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고른 옷이 빨간 입술 자국이 그려진 흰색 반팔 티셔츠였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건 그럴 때를 위해 있는 말이다. 빨간 입술 반팔티라니. 지금 생각하면 눈 앞이 아득해진다. 그 옷을 입고 종로 거리를 걷다가 (당시는 친구였던) 지이를 마주쳤다면, 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의 연애 초기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의 정신세계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치 영화 에서 AI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를 대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처럼.


그 날 나는 긴 청바지에 빨간 입술이 그려진 하얀 반팔티를 입고 집을 막 나서기 직전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쎄함을 느끼고 어머니를 불렀다. 나 이 옷… 괜찮아 보여요? 티셔츠의 입술 자국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갈아입는게 어떨까?”


어쩌면 그때가, 마치 영화 <나비효과>에서 주인공이 미래를 바꾸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그 티셔츠를 벗고 좀 더 무난하고 사람다운 선택을 했다. 그리고 베이지핑크 치마를 예쁘게 입은 아내를 만나 서울 시내 데이트를 했다.


그 날 우리는 미술관을 갔다가, 저녁을 먹고, 종로를 걸었다. 술을 한잔 하고, 노래방을 갔다가, 새벽 첫 차가 운행을 시작할 때까지 청계천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남사친여사친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날이었다.


며칠 뒤, 나는 그 옷을 버렸다. 그리고 내가 왜, 어디서 그 옷을 샀는지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선명한 입술 자국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빨간 입술은 잔망스럽게 움직이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나를 가슴팍에 달고 그 애를 만나려고 그랬어? 감히?”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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