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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의 퍼스널쇼퍼

by 홍지이

지금은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을 지향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중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난 쇼핑, 그중에서도 옷 쇼핑 중독자였다. 결혼 전, 이미 여러 차례 옷걸이가 내 옷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무너졌었다. 옷장도, 붙박이장도 둘 다 버티지 못해 허물어졌고, 행거는 워낙 약해빠진 녀석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남편 미립이는 결혼 전에도 후에도 쇼핑쟁이이자 옷친자였던 아내의 옷에 대한 감각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옷 입기에 대해 나에게 하나 둘 물어보기 시작했다. 물어보는 수준은 결혼 생활이 지속되는 만큼 서서히, 자연스레 진화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남편 미립이의 옷 입기에 대한 나의 역할 진화 3단계의 기록이다.


1단계

양말 스타일리스트


처음 시작은 양말이었다. 함께 외출을 하는 날이면 우린 각자 준비를 하다 옷을 입을 차례가 되면 서로를 기웃거렸다. 서로 입은 옷의 색이나 무드가 맞으면 더 좋지 않을까? 이건 데이트 때는 하지 못하는 부부만의 특권인 것 같았다. 요즘 같은 가을, 캐주얼하게 입을 때면 색을 맞추기보다는 주로 외투의 질감 따위를 맞췄다. 남편이 야상 점퍼를 입었다면, 난 가급적 코듀로이나 데님 같은 튀는 소재의 재킷은 입지 않지만 트렌치코트나 블레이저는 입어도 되는 식으로. 스타필드 같은 몰에 갈 때 후드집업이나 조거팬츠, 여름엔 특히 반팔티에 반바지를 입으면 서로를 향해 '너무 꼬마 아니야?'라고 말한 뒤부터 그런 스타일을 입을 대면 "너도 오늘 꼬마야?"라 물으며 상대의 옷차림을 탐색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편이 현관 앞에 선 채, 양손에 상반된 디자인의 양말을 각각 들고 기다리고 있다.

"어느 게 나아?"

물어볼 때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거 아니면 저거를 골라줘서 그랬을까. 옷을 다 입은 뒤 행해지는 최종 양말 고르기의 역할을 내게 부여했다. 이 작지만 큰 시작이 바로 1단계.


2단계

패션 흥선대원군 궤멸자


놀라운 사실 하나. 미립이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반바지를 입지도, 사지도 않는 보수적인 남자였다.(옷은 아니지만 머리 펌을 해본 적도 없다!) 더위도 적잖이 타는 양반인데 종아리만 내놔도 얼마나 시원한데, 가랑이로 종종 바람이 들어오면 얼마나 상쾌한데, 와 같은 말로 반바지를 '입히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이제는 초겨울 직전까지 반바지를 입는 남자가 되었다. 그의 종아리는 나보다 더 곧고 예뻐서 조금 짜증 난다.

반바지는 하나의 사례다. 그는 여름에도 늘 운동화만 신는 사람이었기에, 통풍이 잘되는 여름용 로퍼와 샌들, 버켄스탁 류의 슬리퍼도 알려줬다. 이젠 샌들에 구멍이 날 정도로 애용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데다 약한 비는 우산을 쓰지 않는 편이라 생활 방수가 '바람막이', 콕 꼬집어 파타고니아의 토렌쉘 점퍼를 함께 사면 어떻겠냐고 50번 정도 이야기했다. 관심을 보이지 않길래 먼저 사 버린 뒤 입고 눈앞에 알짱거렸다. 제주 여행에서 특히 본전을 뽑는 나를 보더니 몇 달 뒤 구입. 그 점퍼도 구멍 날 날이 코앞이다.

이런 사례를 나열하면 시리즈를 만들 수 있을 정도다. 패션 쇄국정책을 꾀하던 흥선대원군의 사상을 궤멸하기 위해 구르고 구른 날들이여. 눈물 없이는 말하지 못하리. 그리고 진화는 계속된다.


3단계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


고객이 보다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맞춤형 쇼핑을 도와주는 전문 쇼핑도우미다. 퍼스널쇼퍼는 고객의 직업, 나이, 체형, 구매성향, 경제 수준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해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물품을 추천하는 일을 담당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퍼스널쇼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남편의 쇼핑을 위한 돈이 모이는 통장이 있다. 그곳에 매달 일정 금액을 자동이체해 두었다. 이제는 "이 옷 살까?"라고 묻지도 않는다. 그의 옷장 사정과 취향까지 다 알게 된 나는 일정 금액이 모이면 미리 봐뒀던 옷을 알아서 주문하고 도착한 택배를 남편에게 건넨다. 자주 입는 브랜드도 거의 고정이라 옷마다 사이즈도 대략 알고 있어서 사이즈로 인한 교환도 사라졌다. 최근에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질 거라는 기상예보를 듣자마자 환절기마다 늘 변변찮은 데님 집업을 고수하는 남편의 짠한 뒤태가 떠올랐다. 바로 목까지 지퍼가 올라오는 단단한 질감의 워싱 데님 집업과 사무실 의자에 걸쳐두고 입을 수 있는 카디건을 주문했다. 둘 다 크롭 기장이다. 남편은 엉덩이를 덮는 상의나 외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의 퍼스널 쇼퍼가 되는 것으로 3단계로 진화했다. 설마 4단계가 있을까? 상상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서울에서 쓸 모자가 없다고 말하더니, 곧장 쿠팡의 로켓배송으로 알 수 없는 모자를 주문하는 만행을 보며(심지어 모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후문까지 남기며) 경악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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