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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절은 어디일까

환절기

by 홍지이

“내일 아침 4도래.”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영상 통화를 하는데 미립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에 틀어만 놨던 TV 속 뉴스 앵커의 마무리 인사가 생각났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 옷을 단단히 챙겨 입으라던. 지금 생각해보니 참 다정한 양반이네. 이젠 아침 식사로 시원한 과일과 요거트를 먹기엔 힘들겠다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올여름의 작별 인사는 길고 지루했다. 입추와 처서를 지나도록 기 싸움을 이어간 더위도 별수 없구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다니. 그러고 보니 조금 섭섭도 하네. 이젠 아침에 목넘김이 좋은 따끈한 수프를 먹어 장을 따뜻하게 데워야 하는 계절이다. 렌틸콩 수프에 뭐가 들어갔는지를 생각하며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샐러리와 토마토퓌레 따위를 떠오르는 대로 담았다.


하지만 내일 아침 제주도는 15도인걸. 여긴 이제야 가을로 봐줄 만한 아침 기온이다. 4도의 서울은 초겨울의 영토에 들어섰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제주와 서울의 온도 차가 이 정도라니. 우리 사이에 걸쳐진 수많은 구름과 무수한 바람을 생각하고 보니 그럴 만도 싶다. 다행히 이번 주엔 서울에 머물던 미립은 귀한 주말의 시간 중 반나절 가량을 할애해 옷방에서 계절 갈이를 했다. 아직도 시어서커 재질의 베개커버를 쓰고 있던 걸 딱 걸린 이후 감기 들기 전에 얼른 겨울 침구로 바꾸라고 잔소리 하나, 압축해놓은 겨울옷도 꺼내서 정리해라 잔소리 둘을 늘어놓은 까닭이다. 다행히 그는 앵커의 염려에 보답할 수 있게 되었다. 8온스가량의 누빔 점퍼를 찾아냈기에 제법 단단히 챙겨입을 수 있을 테다. 그 점퍼는 작년 가을 같은 옷을 다른 색으로 각각 장만해서 함께 입었다. 짝꿍 옷인 된 내 것은 제주 옷장에 걸려 있는데, 얘는 올해 공기를 쐬려면 아직은 먼 것 같다.


지난주에는 제주살이 꼬박 10년 차에 들어선 지인을 만나 밥을 마시고 차를 기울였다. 아직 제주에서의 사계절을 살아내지 않은 내게 그는 까마득한 입도 선배였다. 사는 곳이 지척이라 서로의 동네에 관해 이야기 하다, 제주에 처음 들어설 때 어디에 터를 잡을까 고민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나는 중문에 살던 지인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꺼냈는데, ‘모슬포’가 바람이 몹시 불어 몹쓸포, 못살포에서 비롯했다는 일종의 유머였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익히 알려진 바람보다 중요한 건 햇빛인 걸 아냐며, 제주의 일조량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전했다. “제주는 생각보다 쨍하게 맑은 날이 없어요. 살다 보면 알 테지. 특히 겨울 되면 해 얼굴 구경하기가 어렵더라고. 그래서 전 콧잔등엔 주근깨가 맺히고, 기미가 광대를 기어오를지언정 그놈의 햇빛, 귀하고 반갑고 그래요.”


마침 날이 좋으니 해안가에 있는 카페 2층에 앉으러 가자는 제안은 그의 햇살론에 더욱 큰 힘을 실었다. 우리는 제주로 오가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북쪽 해안으로 가 쫀득한 휘핑크림을 이고 있는 커피를 마셨다. 뉴스마다 ‘이제 쌀쌀하다’고 어깃장을 놓길래 긴 팔 맨투맨을 입었는데, 낮이 되니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일행도 아까까지 입고 있던 하프 트렌치코트를 어느새 반으로 접어들고는 한 손으론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 가을로 봐주기에도 어려운걸. 때마침 육지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의 첫 마디는 “춥지?” 였다. 아니요. 엄마, 여긴 더워요. 북쪽에서 내려오던 가을이 여기까지 못 오고 추자도 쯤에서 쉬고있나봐요.


문득 점점 벌어져가는 서로의 시차를 오직 마음으로 메우려던 어린 연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 미카코와 노보루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어렴풋이 느꼈는데, 우주 탐사대의 파일럿으로 선발된 미카코가 먼 우주로 떠나게 되며 둘은 메일로 소통을 이어간다. 그러나 미카코의 함대가 지구로부터 점차 멀어질수록 그들 사이의 시간은 며칠에서, 몇 주, 몇 년으로 벌어진다. 서울은 마음먹으면 몇 시간 만에 갈 수 있지만, 그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4도의 추위를 가늠할 수 없고 제주의 따스함을 전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주만큼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초가을에, 엄마는 늦가을에, 미립이는 겨울에 그렇게.


옷 정리를 마친 미립이 두고 온 나의 겨울옷 일부를 택배로 보내주기로 했다. 12월쯤에 서울에 갈 때 가져오면 되는 걸 괜히 서둘렀나 싶기도 한데. 주말 지나 평일에 배송이 시작될 테니 넉넉히 사나흘 뒤에 내게 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제주도 조금 더 추워지겠지. 우리의 계절은 어디일까. 환절기가 되니 더욱 벌어진 아침저녁의 온도 차가 스산함을 더한다. 나보다 먼저 추위에 당도한 그의 마음 ‘가지가지에 외로운 생각이 헤메이’지 않도록 그에게도 단단한‘흰 바람벽’이 있기를. (백석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인용)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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