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수능을 본 뒤 대학생이 되기 전에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필기시험 커트라인 70에 72점으로 턱걸이를 했고 다행히 실기와 도로연수도 한 번에 통과했다. 면허증 사진은 주민등록증 사진보다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레 주민등록증은 서랍 속에 쳐박혔고, 주로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했다.
그랬다.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나의 운전면허증은 사실 신분증이었다. 그것은 한 동안 나의 신분을 증명했지만,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운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도 안다. 우리는 이걸 ‘장롱면허’라고 부른다.
제대 후 미국에 6개월 어학연수를 갔다. 동남부 지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 콜롬비아였다. 작은 소도시여서 모든 것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숙소와 어학원은 걸어다닐 만 했지만 장을 보려면 차가 필요했다. 현지에서 미국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주말이면 차를 렌트해서 마트도 가고 근교 드라이브도 나갔다. 보스턴 뉴욕가지 운전을 해서 여행도 다녀왔다. 그것도 어렵지 않았다.
미국은 주로 직선으로 쭉 뻗은 넓은 길에 ‘왜 이렇게 차가 없지?’ 싶을만큼 차가 많지 않았다. 신호도 많지 않아서 운전하기가 편했다. 한국에서 면허를 취득한 후, 몇 년간 운전을 하지 않다가 미국에 가서야 처음 차를 몰고다닌 나에겐 뭐랄까, 첫 직장을 너무 워라밸이 좋은 신의 직장에 취업해버린 사회초년생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래서 그 다음의 평범한 직장에서는 적응이 어려워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다.
한국에서의 운전은 미국과 달리 만만치가 않았다.
아버지의 세컨카(실소유주는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다.)를 타고 주말마다 운전 연습을 했다. 개인 교습을 두어번 받았고, 아버지가 조수석에 앉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처음 혼자서 차를 몰고 나갔을 때가 생각난다. 수원의 우리집 주변은 도심 한복판은 아니었지만, 월드컵 경기장과 학교, 병원 등이 위치해서 유동인구가 많았다. 차도 많이 다녔다. 내가 하려던 건 단지 혼자서 경기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갑자기 나타난 오르막 끝에는 사거리가 있었다. 사거리 너머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필 내가 사거리 닿기 전에 노란불이 되었다. 멈추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속도를 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속도를 내기엔 너무 늦었던 상황이었다. 사거리를 급하게 건너자마자 횡단보도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이미 건너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 때문에 놀란 사람들에게는 미안함을 전할 방법조차 없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동안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처음으로 직장인 여자친구가 생겼다. 나는 26살이었고, 그녀도 26살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아내다. 이십대 중반의 연애에는 종종 차가 필요했다. 근교로 나들이를 가거나, 1박 2일 여행을 갈 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운전을 하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둘 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도 좋아 보였다.
한창 잘 보이고 싶었던 연애 초기에 동갑내기 직장인 아내에게 “나는 한국에서 운전하는게 무서워.”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했다.
아내도 나와 다름없는 초보였는데, 얘는 도통 두려움이라는게 없었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처음 차를 렌트해서 여행을 갔을 때도,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부산 시내를 운전했을 때도, 폭설이 내리는 겨울에 헤드라이트 하나가 고장난 렌트카로 대관령 꼬불길을 뚫고 갈 때도 (물론 티는 났겠지만) 겉으로는 의연한 척, 담담한 척을 했다. 그렇게 경험치를 쌓았다. 내 마지막 연애가 줄어드는 만큼 운전 실력이 늘어갔다.
운전을 해서 우리가 얻은 행복한 순간들을 적어 본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렌트를 한다. 차를 몰고 남쪽으로 향한다. 톨레도를 지나 조금 더 내려오면 안달루치아의 올리브 언덕이 나온다. 부드럽게 휘어있는 도로 양 옆으로 하늘이 가리지 않을 만큼의 연녹색 언덕들이 완만한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언덕 위에는 올리브나무가 때로는 듬성듬성, 때로는 빼곡히 자라있다. 시간이 영원하고 해가 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차를 몰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다.
금요일 오후 두시쯤 서울에서 차를 몰고 출발한다. 조수석에는 아내, 뒷 자리에는 강아지가 타 있다. 처음엔 차가 많다. 역시 서울이다. 두시간 쯤 내려가면 수도권을 벗어난다. 차들이 뜸해지기 시작한다. 충청도를 지나면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눈치를 보면서 속도를 내본다. 아내와 교대로 운전하며 목포에 도착한다. 어느덧 밤이다. 촉촉한 해안 도시의 밤 공기가 볼에 와 닿는다. 차를 배에 싣고 반려견 전용 룸에 가서 잠이 든다. 아침이 오면 차를 타고 바로 제주 여행이 시작된다. 비행기에서 짐을 찾고 캐리어를 끌고 렌트카 회사로 가는 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 우리 차로 바로 시작되는 새벽 제주 여행의 맛. 그 맛에 빠져들면 여섯시간의 운전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함덕과 월정을 지나 세화부터다. 하도, 종달, 성산으로 이어지는 동쪽 해안도로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바닷가길이다.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사람의 흔적이 묻어있다. 마치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듯 가까이서 하는 드라이빙은 몇 번을 반복해서 오가도 지루하지도 지치지도 않는다. 이 해안도로 때문이다. 우리가 제주 한달살이를 하고, 결국 한해살이를 하게 된 건. (정작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서쪽이라는 건 현실의 함정)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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