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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달려가야지. 전속력으로

운전

by 홍지이

운전면허는 아마 내가 처음으로 취득한 국가공인 자격증이었을 거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취득했지만 오랫동안 운전면허증은 술집이나 은행과 같이 신분을 확인해야 할 때마다 가끔 주민등록증의 대타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실제 운전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먼 훗날, 결혼하고 신혼집과 직장이 애매하게 멀어지면서부터였다.


지르는 성향이라 겁 없이 운전하고 다녔다. 혼자 긁고 다녀서 차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기스를 냈고, 펑크를 내서 보험회사 서비스를 부르기도 했다. 자잘한 일들은 어찌어찌 해결해 나갔지만, 대차게 큰 사고를 한번 냈다. 서울 을지로 한복판에서 추돌 사고가 난 것이다. 그것도 BMW와.





금요일 저녁 정시 퇴근 후,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남편을 태우러 남편 회사가 있는 을지로에 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에 멈췄다가 출발하는데 내 차선 앞에 트럭이 임시정차 중이었다. 옆 차선으로 이동하며 출발했는데, 뒤차와의 거리가 충분치 않았는지 그 차의 앞쪽 옆 부분과 내 차의 뒷좌석 옆구리가 부딪혔다. 사고가 났을 때의 프로토콜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우리 사고로 정체가 시작되자 많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차 빼!!’ 상대 차주분은 금 체인 목걸이에 골프셔츠를 입고 히어로 변신 벨트처럼 명품 브랜드의 앰블럼이 커다란 벨트를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이쪽으로 전력으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남편이었다. 사고가 난 지점은 남편의 회사 약 1km 떨어진 곳이었을 거다. 남편이 오고 급격히 안심되었다. 내 편이 나를 위해서 달려와 주었다. 결심했다. 나도 언제든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달려가야지. 전속력으로.


그런데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한다. 오래달리기는 더욱더. 그래서 남편을 위해 차로 달리기로 했다. 서울에 살 때는 서울 시내에서의 운전은 나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출퇴근을 운전해서 다녀서 주중에는 거의 내가 운전했다. 아침이면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서서 차에 태우고는 도보로 10분가량 걸리는 지하철역에 굳이 굳이 내려줬다. 아침마다 함께 차를 타고 나가자는 나를, 남편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걸어가겠다고 한 날도 있었다. 함께 출근하는 길이 나는 왜 좋았을까.


이것은 우리 부모님의 보살핌의 방식에서 기인한 듯 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분 다 운전을 즐겨하시는 분이었다. 언니와 나, 동생을 태워다주고 데리러 가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여름엔 더우니까, 겨울엔 추우니까, 비 오는 날엔 비가 오니까, 눈 오는 날엔 눈이 오니까, 밤이면 밤이니까, 아침이면 아침이니까. 모든 날은 모든 이유가 되었다. 경기도에서 살며 서울로 출근하던 시절엔 광역버스를 타야 했다. 아빠는 아침마다 나와 언니를 차에 태우고 집 앞 버스 정류장을 거슬러 종점쯤까지 거슬러 가서 내려 주셨다. 앉아서 가라고, 자면서 가라고. 아빠는 늘 시동을 켜놓고 먼저 나가 계셨다. 항상 엔진을 켜둘게. 사랑은 시간을 쓰는 일이고 쓴 시간을 갚으라 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부모님께 받은 가르침, 그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생활밀착형 염려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조금은 편안하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최소한의 돌봄. 이리저리 치이며 고된 하루를 보냈을 이의 퇴근길에 깜짝 등장하는 작은 행복. 좁고 낮지만 작고 안전한 세상, 내가 움직이는 차 안에서 한숨 돌리는 남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무수히 많은 날 나를 태우고 다니셨는 부모님의 마음을 돌아본다. 난 몇 번이나 시동을 걸어 남편에게 갔을까. 때로는 혼란한 세상에서 너를 구해내듯, 비장한 마음을 품고 나선 적도 있다. 혼잡한 지하철 역 출입구 앞, 하고많은 사람 중 오직 남편을 태우기 위해 차를 세우면 종종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문을 열고 남편이 탈 때, 남편의 뒤에는 어딘지 부러운 듯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는다. 어쩌다 그들을 볼 때면 이런 사랑의 방식도 썩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참 자율주행 차량 보급에 대해 말이 오갈 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답보 상태인가보다. 그럼 그렇지. 운전이 얼마나 스윗하고 마음을 쓰는 일인데 누구한테 맡겨. 제주에 살고 있는 올해부터는 매주 금요일, 혹은 목요일 저녁과 월요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제주 공항으로 간다. 서울에서 오고 또 서울로 가는 남편을 태우고 데려다주러. 물론 남편이 대중교통 타고 제주집과 공항을 오갈수도 있지만, 나는 또 남편을 태우기 위해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그리고 달린다. 아직 우리집에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구하러.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 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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