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몇 주전 금요일이었다. 퇴근 후 누나의 집에서 (구)가족 모임을 가졌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내가 모여 소고기에 와인을 마시는 육식육식한 모임이었다. 누나의 집은 수원이고, 유치회관이라는 유명한 해장국집이 근처에 있다. 금요일 저녁에 술과 고기를 했다면, 다음날 아침은 해장국이 당연한 수순. 게다가 전국적 해장국 맛집이 근처에 있다면 그건 피할 수 없는 코스인게 분명하다. 역시나 우리는 금요일 저녁 자리가 끝날 때 쯤 다음날 아침식사는 유치회관에서 하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우리 고마~ 가지말고 집에서 육개장 끓여논 거 묵자.”
어머니가 ‘그냥 하지 말자’ 기술을 시전했다. 유치회관의 맑은 해장국 국물에 잔뜩 들어있는 고소한 선지를 푹푹 떠먹을 생각에 금요일 수원 약속이 잡힌 그 순간부터 설레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누나가 소소하게 저항해 보았지만 이미 최고 권력을 보유한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순순히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나는 보통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타입이므로 결국 우리는 해장국 플랜을 취소하고 집에서 육개장을 먹었다.
어머니의 변덕은 우리 가족에게는 유명하다. 외식이든 여행이든 아무리 오래 전에 계획이 잡혀 있어도, 어머니는 ‘그냥 집에서 쉬자.’를 주장한다. 전혀 다른 플랜 (벚꽃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절에 가자고 한다거나)을 제시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하지 말자’를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뭔가를 하려고 했다가고 막상 하려고 하면 안하고 싶은 마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만 편안하고 있고 싶은 마음. 어떠한 변화도 거부함으로써 최대한 안전하고 싶은 마음. 사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나는 잘 안다.
늘 하던 것을 꾸준히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조금의 변화라도 시도하려 하면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오만가지는 떠오르는 그런 사람. 그건 나의 어머니이면서 나이기도 하다.
오랜 친구로 지내다 마침 둘 다 만나는 사람이 없었던 16년 전. 여름 내내 썸을 타다 그 애매한 관계에 의문을 던진 것은 아내였다. 5년에 가까운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이라는 개념을 우리 사이에 떠오르게 한 것도 아내였다. 그리고 “제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마치 “퇴사하고 싶다” 또는 “건물주였으면 좋겠다”와 같은 주문에 불과했던 문장을, 손에잡히는 현실로 빚어낸 것 또한 아내였다.
심지어 주말 부부의 삶을 소재로 브런치에 글을 써보자고 했을 때도, 첫 번째 연재글을 올리기 전날 저녁, 나는 “안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며 어머니에게 배운 ‘그냥 하지 말자’ 기술을 시전해서 아내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우리 부부 사이의 대부분의 변화는, 아내가 밟은 가속페달에서 시작되었다. 여행을 떠나고, 이사를 하고, 우리집을 갖고, 강아지를 입양하는 일까지. 가끔 나는, 내가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십대 중반 어디쯤에서 더이상 자라지 않고 멈추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부부의 역할은 그렇게 나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어머니의 곁에는, 무어라도 새로운 걸 하고 싶어 죽겠는 아버지가 있다. 나의 아버지가 어느 정도인가하면,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의지와 설득으로 귀향을 한 지리산 옆 시골집에서) 아들과 딸, 며느리까지 불러놓고 술을 드시다가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없이 살아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한 게 정말 아쉽다 나는!”
직장인이면서 사업가였고, 산악회 회장이면서 조기축구회 회장이었던 아버지. 은퇴를 하고 귀향을 한 이후에도 뭐가 계속 하고 싶어서 이층집의 한 층을 양조공방으로 만들고, 맥주와 전통주를 빚는 아버지에게 ‘해보지 못해 아쉬운 것’이 내가 없는 삶이었다니!
얼마 전 제주에서 아내가 쓰던 블루레이 차단용 뿔테 안경을 써보았다. 아내는 나를 보더니, 어머니와 똑같다며 웃었다. 거울을 봤다. 갈색 뿔테 안경 너머에 크게 쌍꺼풀 진 눈, 눈썹과 눈 사이의 움푹 패인 그늘, 눈가에 조금씩 번지는 주름이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그렇게 만나는가 보다. 어머니를 닮아서 나는, 당신이 자신과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 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렇게 잘 살아오고 있는가 보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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