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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씨 Aug 12. 2024

푸드코마

& 옷 잘 입은 안멋쟁이 2004. 7


유튜브 숏츠에 생선구이집 정보가 올라왔다. 생선구이는 거부할 수 없다. 자주 먹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다. 조리 후 온 집안이 주방이 되는 마술이 일어난다. 조리방법과 도구를 바꿔봐도 결과는 대동소이하다. 대신 구워서 주는 생선은 챙겨야 한다.


웨이팅을 피하려고 늦은 점심시간에 맞추고 두 딸을 초대했다. 평일 오후라 일정을 빼기 쉽지 않았을 텐데 흔쾌히 응했다.


미사리 부근으로 나들이 삼아 가기 좋은 곳이다. 한강 건너 조정경기장이 있다. 지난주 가평 세미원을 다녀올 때 조정경기장을 지나쳐 갔는데 들러 보고 싶었다. 식사 후 그곳을 걸어볼 심산이다.


며칠째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중이다. 오랜만에 해가 쨍하다. 바람은 없다. 어제의 남은 습기가 채 가시지 않아 무덥다. ‘무자비하게 ’덥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그 과정도 걷기가 된다. 요즘은 뚜벅이로 다니는 장점과 수혜를 누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무더울 땐 변덕도 미덕이다ㅎㅎ. (마구 갖다 붙여라) 운전하기로 맘을 바꿨다.


딸에게 운전을 맡기고 빠르게 스치는 한강변 풍경에 푹 빠졌다.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다. 뒷자리 차창에 바짝 붙어 앉아 하늘과 구름과 강의 조합에 감탄하며 기꺼이 동행해 준 두 딸의 수다를 듣고 있으니 나이 든 내가 좋다. 하얀 구름 사이 좀 더 무거운 구름이 부근 날씨가 아직 궂음을 알려줬다.


웨이팅 없이 착석했다. 실내가 춥다. 너무 추워 덜덜 떨렸다. 마침 우리가 앉은 구역은 큰 홀에서 떨어져 있어 에어컨이 따로 있다. 세기를 줄여 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후 한껏 차려입은 멋쟁이 시니어 커플이 옆 테이블에 앉았다. 여사는 스카프를 센스 있게 두르고 칼라풀한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켓도 입었다. 마로 된 신사의 자켓도 멋졌다.


앉자마자 에어컨을 세게 튼다. 갖춰 입은 데다 지금 막 도착해서 더울 수 있겠다. 더위가 가시면 세기를 낮춰 달라고 부탁했다. 거기까지다. 예의도 멋쟁이길 바라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우리는 얇은 반팔 티셔츠 차림이다. “그러게 왜 이런데 오는데 옷을 얇게 입고 오냐”고 여사가 들으란 듯 말란 듯 중얼댔다.


이런 거친 태도는 기대하지 못했다. 한 달 전 일인데 워딩이 정확히 생각날 정도니 내가 조용히 넘어갔을 리 없다. 거친 태도엔 거칠게 대응하는 편이다. 그러게 너무 두껍게 입고 오셨네요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면 저를 보고 하시죠? 중 어느 것으로 할까 잠깐 고민했다. 후자로 했다. 대꾸가 없다. 딸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곧 양 테이블에 동시에 찬과 밥이 서빙됐다. 분위기를 간파한 직원의 센스일지도 모른다.


고등어와 가자미가 섞인 모둠구이를 골랐다. 따듯한 밥을 먹으니 겨우 떨림이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먹는 생선구이라 남김없이 먹고 찬도 싹싹 먹었다. 밥을 다 먹도록 에어컨이 휭휭 돌았다.


일어나려 부스럭대자 그제야 여사가 돌아보며 “어머, 잊어버려 죄송…” 한다. 잊었던 게 그때 막 생각나진 않았을 거다. 배배 꼬인 배려부족형 인간은 싫다.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 딸은 잘 안다. 나는 강단에서 체득한 불같은 목소리를 낼 줄 안다. 딸이 재빠르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정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안멋쟁이여사를 한방 멕였다.


식당은 넓어서 쾌적하고 직원의 에티튜드도 흠잡을 데 없었다. 생선구이는 부드럽고 찬의 구성도 훌륭하다. 그러나 화학조미료를 피할 순 없었다. 식사 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나친 msg를 먹은 후 나의 신체 반응이다.


조정경기장에서 가까운 아파트단지 상가에 팥에 진심인 팥죽가게가 있다. 그 진심을 담아 팥빙수도 한다. 딸의 제안이 찰떡이다. 이럴 땐 빙수가 시급하다. 가게 주인장은 젊지만 자신감이 우러나 보였다. 웃지 않지만 기분 좋게 친절하다. 팥빙수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리스트에 고이 간직할 집이다.


걸어 볼 시간이다. 아파트 중간을 가르며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길 양 옆은 나무가 빽빽하다. 아파트 건물이 지척인데 나무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산책객에게 사생활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 시냇물도 길을 따라 흐른다. 길 끝은 조정경기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경 관련 상 몇 개는 가볍게 받았을 성싶다.


후드드득, 소나기를 만났다.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로 우산을 꺼낼 준비를 시킨다. 빗방울이 굵고 세차다. 조정경기장에 진입하지 못했는데 퍼붓는 비에 발은 푹 젖었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Call it a day.


귀가하는 차 안. 앞 좌석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딸들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 들었다. 엄마는 푸드코마 상태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잠이라기보다는 최면상태 같았다. 한계치를 넘은 화학조미료가 날 뚜드려 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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