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그리고 종묘와 50년 전 기억.
며칠째 비가 온다. 물 먹은 솜이 따로 없다. 마룻바닥에 닿은 맨발이 쩌억 붙을 것 같다. 선선한 날씨임에도 습기 때문에 에어컨은 돈다. 그것조차 임계점에 도달했다. 드디어 함께 돌리기를 시전 할 때다.
방마다 보일러를 틀고 습기 말리기에 들어갔다. 장마철 습기제거엔 이만한 게 없다. 당연히 집안 기온이 고속 상승한다. 그래서 에어컨도 “함께” 돌려야 한다.
매년 장마철이면 두세 번은 이렇게 한다. 그 덕인지 우리 집은 어디에도 곰팡이 핀 적이 없다. 그런데 올해는 장마 초반인데 벌써 두 번째 함께 돌리기를 했다. 관리비 고지서가 또 최고를 경신할 것 같다. 에어컨은 끈 채 보일러만 작동시켜 놓고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렸다. 비 오는 날에 더욱 멋질 것 같은 운현궁으로 갔다. 이런. 휴궁이다. 궁궐들은 월요일이나 화요일 중 하루는 문을 닫는다. 가까운 종묘가 월요일에 개방한다.
종묘는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다. 50년이 훨씬 넘는 기억이라 희미하지만 부모님 손잡고 당시 창경원에 가면 구름다리를 건너 종묘로 들어갔었던 것 같다.
창경궁과 종묘는 길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오래전 창경원이 있었다. 궁이면서 일제강점기에 동물원이 되었고 오랫동안 그렇게 남아 있었다. 1980년대에야 복원되어 원래 이름을 찾았다. 창경궁이다.
창경원이었던 때 봄이면 먹고 떠드는 벚꽃나들이 인파로 북새통이 되었었다. 아버지가 작은 소리로 역사를 알려주며 동물원으로 남아있는 부당함에 대해 말했었다. 조그만 애가 알아들으리라 기대했을까. 그래도 기억하고 있으니 헛짓은 안 하셨다.
일제시대도 아닌데 왜 작은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는 안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그걸 나 죽기 전에 다시 목도하게 돼서 유감이다.)
종묘는 주중에는 해설사 동반 관람만 가능하다. 티켓을 받고 내 타임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비 오는 날은 역시 카페다. 익선동 한옥거리에서 맘에 드는 카페에 앉았다. 신박한 카페 인테리어에 절로 흥이 난다. 딸이 합류해 커피는 더 맛있다. 마침 오전에 광화문에서 일을 마친 딸이 전화했다. 이 시간쯤 엄마가 궁궐 나들이 중일 수 있겠단 생각이 났단다. 귀신인가.
정시에 입장했다. 향대청, 가운데는 밟지 말라는 신로, 왕이 제사 의복을 갖추던 재궁, 영녕전, 종묘의 하이라이트 정전에 이른다. 정전은 신주를 모시는 주 건물이다.
미디어로 정전의 모습을 몇 번 보았다. 극도로 절제된 낮고 긴 목조건물이다. 길어서 더욱 낮아 보이는 이 건물은 낮아서 지극히 높아 보였다. 화려함 일도 없는 기와지붕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하아… 그런 정전이 휘장 뒤에 숨어 수리 중이었다.
관람객들의 탄식이 터졌다. 그것조차 역사의 일부라며 그 현장을 목격한 거라는 해설사의 위로가 따라왔다. 50여 년간 기억 속에 간직해 온 종묘를 오늘 마주 한 종묘가 따라오질 못했다. 그동안 미디어에서 접한 모습이 기억 속에 더해져 점점 자라났을까.
오늘의 투어는 해설사가 다했다. 정확한 발음으로 여러 사람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렸다. 간결했던 종묘사직 해설은 유익하고 훈훈했다. 정전을 보지 못한 건 내내 아쉽다. 뜯고 보니 공사가 더 커서 이미 공기를 훅 지났단다. 2025년 3월쯤 기대한다니 계획에 참고하시라.
부슬비가 계속 오고 있다.
집안에 들어섰다. 후끈하다. 대신 습기 없는 더움이다. 에어컨을 튼다. 오늘 밤은 뽀송하게 잠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