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린이”의 썰 2 out of 3
의사의 조언에 따라 걷기 연습을 바로 시작했다. 집 앞 하천 산책로가 접근성이 좋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걸어도 된다에서 걸어야 한다로 바뀌니 관점이 달라졌다. 발목이 아파도 쉬지 않았다. 넘어서려고. 걸음마 연습이 재밌어 날이 더운지도 몰랐다. 압박붕대를 칭칭 감고 누가 봐도 민망한 걸음이었지만 열심히 걸었다.
매일 하천의 같은 구간을 걷자 그 부근 상류와 하류를 오르내리며 사는 몇 오리 가족의 스토리를 꿰게 되었다. 길고양이도 이 하천변에 의지해 산다. 이 하천은 풍수가 좋은 게 틀림없다. 오리들의 미모도 뛰어난데 길고양이조차 예쁘게 생겼다ㅎㅎ. 솜털이 보숭한 아기 오리의 생사를 걱정하며 아침저녁으로 나갔다. 새끼를 잘 키워내는 엄마 오리가 더 많지만 밤사이 고양이에게 몽땅 털리거나 새끼를 흘리고 다니는 경험 없는 엄마도 있다. 무사한지 숫자를 세는 게 인사가 됐다. 늘 보던 장소에서 오리가 안 보이면 상류까지 더 올라가 보느라 걷는 거리가 늘었다. 아기 오리들의 귀여움에 홀려 발길을 멈춘 산책객과 오리 가족 근황을 주고받으며 너나 할 것 없이 오리 이야기에 한마음이 되었다.
여러 오리 무리 중 유난히 마음이 가는 이 엄마 오리는 9마리 새끼를 데리고 주로 하류에 머물렀다. 체구가 작고 겁이 많아 활동영역이 좁았다. 백로가 다가와도 지나가던 오리가 시비를 걸어와도 공격은 못하고 새끼들을 데리고 피하기만 했다. 그래도 영리하게 9마리 새끼를 잘 건사해 나갔다.
밤새 폭우가 있던 다음날 유난히 하류에만 있는 오리가족에게 아무 일 없길 바라며 아침 일찍 하천으로 나갔다. 이런, 일이 생겼다. 새끼 한 마리만 홀로 있다. 낙오된 아기 오리는 아직 정신이 없는지 가냘픈 삐약거림만 내며 떠다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머지를 찾으러 풀숲을 들여다보며 부리나케 걸었다. 엄마는 나머지 새끼들을 이끌고 상류로 몸을 피해 있었다. 급했을 상황이 그려졌다. 그런데 새끼가 7마리밖에 없다. 하… 다른 한 마리는 어디에도 안보였다. 물살에 떠내려 가 버렸나 보다.
다시 하류로 갔다. 낙오된 아기 오리가 목청이 터져라 엄마를 부르며 물길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엄마 오리가 목소리를 듣길 아기 오리도 빌고 나도 빌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엄마와 형제들이 있는데 물살에 지쳐 다시 하류로 밀려났다. 어찌나 삑삑 삑삑 크게 우는지 삑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삑삑 삑삑 목이 쉬도록 울며 하천을 오르내렸다.
시간이 자꾸 갔다. 모자로 퍼올려 가족에게 데려다주고 싶은데 붕대를 칭칭 감은 내 발목으론 이끼에 미끄러지고 말 것 같다. 물에 들어갈 수 없어 돌다리 위에서 기다렸다. 손이 막 닿을만하면 휙 몸을 피할 줄 아는 똑똑한 놈이었다. 구청에 뜰채를 요청했다. 뜰채를 들고 온 하천 관리인이 겨우 두 번 시도하더니 냅둬유 하며 자리를 떠났다. 대신 채를 받아 든 나는 딸과 함께 나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똑똑한 삑삑이는 절대 잡히지 않았다. 이틀을 실패하고 잡기를 중단했다. 삑삑이 성질이 나빠질 것 같았고 이 정도로 위험을 피할 줄 알면 잘 살아낼 수 있겠지 싶기도 했다. 엄마를 찾느라 쉬지 않고 울어 삑삑이 목에선 쉑쉑 소리가 났다.
일주일 후 드디어 삑삑이가 엄마와 형제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 너무 늦었다. 그동안 부쩍 몸이 자란 형제들이 삑삑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간 삑삑이를 물고 공격했다. 그렇게 삑삑이는 일주일을 목이 쉬도록 울며 찾아낸 가족을 떠났다. 짠한 마음에 하류로 복귀한 삑삑이를 따라다녔다.
가족과 상봉하고도 배척된 후 삑삑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이리저리 혼자 흘러 다니더니 살아야겠단 정신이 들었는지 어른 오리를 만나면 입양해 달라고 따라다녔다. 귀찮다고 바로 피해 날아가 버리는 오리도 있고 정 많은 오리가 하루 이틀 보살피다 떠나가길 반복했다. 그런 어른 오리가 귀찮아하지 않게 한 발짝 떨어져 먹이 찾는 법과 몸단장하는 법을 배웠다. 혼자서 크는 삑삑이는 자기 형제들에 비해 왜소했다. 그래도 고양이를 피해 씩씩하게 자랐다.
걷는 거리와 속도가 늘어 갔다. 기회만 있으면 나타나는 우울감은 찾아오는 횟수가 줄고 머무는 시간도 짧아졌다. 딸들도 각자가 받은 상처의 크기에 따라 속도는 다르지만 그들의 방식으로 천천히 회복하고 있었다.
매일 밖으로 나갔다. 딸들은 근력운동을 하라고 성화인데 걷기와 막 친해진 내겐 귀뚱에도 안 들린다. 근력운동이 필요한 건 알지만 두 가지는 못할 것도 안다. 저질 체력이어서 꾸준히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다.
점차 더 빠르게 더 멀리 걸을 수 있게 되자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병원 재활은 이미 중단했다. 걷기 연습을 시작하고 3개월 차에는 집 앞 하천을 지나 7킬로 떨어진 한강까지 너끈히 걸었다. 딸들과 함께 걸어 보면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여름의 막바지가 되었다. 새끼 오리들이 차례차례 독립했다. 자식을 독립시키는 엄마 오리들은 냉철했다. 때가 다가옴에 따라 자신은 새끼들의 옆자리로 물러났다. 이때쯤 새끼들은 몸은 다 자라 엄마와 같은 크기가 되었다. 이동할 때는 새끼들을 앞장 세우고 자기는 뒤를 따랐다.
새끼들을 풀숲에 감추고 엄마가 마실을 가기 시작했다. 없던 일이다. 엄마 오리가 날줄 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조금 후 돌아왔다. 새끼들이 먹이를 찾아 물 위에서 놀 때도 마실을 갔다. 점점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며칠 후 새끼들이 엄마를 따라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푸더덕 푸더덕. 첫 시도부터 잘하는 녀석과 연습이 필요한 녀석으로 갈렸다. 엄마는 침착하게 시범을 보였다.
훈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오후 마실 간 줄 알았던 엄마는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독립이구나. 남겨진 새끼들을 보는 애잔한 마음이 수고한 엄마 오리의 새 삶을 응원하는 마음을 순간 덮어 버렸다. 몇 가족이 독립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그들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새끼들은 옹기종기 모여 엄마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맘이 맞는 형제끼리 둘셋 또는 홀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며칠을 보내다 점점 더 먼 곳에서 다른 오리들과 어울렸다.
그러던 중 하천의 가을을 맞이하는 대청소가 있었다. 매년 이맘때쯤 여름내 한껏 아름다웠던 창포를 잘라내고 시든 연꽃도 다듬고 무성히 자란 물가 잡초와 기타 식물을 추려 내곤 했다. 이번엔 예년과 달리 예초기로 깡그리 밀어 벌거숭이로 만들어 놓았다. 전화 속 구청 담당 직원의 첫 반응이 그럴 리가 없단다. 담당 직원이 현장으로 나왔다.
“아… 정말 다 밀어 버렸네요”.
이… 이게 하천관리를 담당하는 직원이 나와보고 할 말이란 말인가. 모기가 많이 생긴다는 민원이 있었다나.
“풀은 금방 자라요… 내년엔 또 무성해져요.”
“지금 당장 집을 잃은 동물들은 어떡하라고요. 모기 때문이면 아주 하천을 메꾸지 그러셨어욧!”
말단 구청 직원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보금자리를 잃은 참새는 바로 흔적 없이 사라졌고 하루를 버티던 오리도 다신 볼 수 없었다. 무사히 새 보금자리를 찾았길… 정나미가 떨어졌다. 나도 집 잃은 오리처럼 그 하천 산책로를 떠났다.
다음 해인 올해 초여름 오리가 궁금해 그 천을 다시 찾았다. 풀은 다시 자라 무성했고 갈대며 다른 식물들도 어른 키만큼 커 너풀거렸다. 물 위엔 반가움과 감격이 가득했다. 새끼들 중 몇 마리가 돌아와 같은 곳에서 엄마가 되어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삑삑이인지 그 형제인지는 분간이 안 가지만 깃털 무늬로 보나 잘 생긴 목선으로 보나 유난히 정들었던 그 형제들이었다. 또 다른 오리 가족들 중 일부도 늠름한 엄마가 되어 자기 엄마보다 더 많은 새끼를 데리고 유유히 헤엄친다. 올해 어떤 아기 오리는 털색이 좀 덜 이쁘다. 에구… 신랑 뽑기를 잘 못했구먼. ㅎㅎㅎ.
나의 재활은 완성되어 있었다. 종아리에 근육이 생겼고 발목이 튼튼해졌다.
오랜만에 경복궁 앞에 갔더니 예상치 못한 풍경이 나를 맞았다. 내가 수십 년 살아온 서울이 여기가 맞나 싶었다. 걷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거리 곳곳을 점령하고 있었고 그들 중 반 이상은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었다. 북적이는데 싫지 않다. 반가운 축제 속에라도 들어간 느낌이랄까. 조용해야 편안한 내겐 새로운 감정이다. 기꺼이 인파 속에 묻혀 본다. 그리고 목적지인 인왕산으로 갔다. 인왕산 자락길과 숲길을 걸어 윤동주 문학관을 보고 자하문을 거쳐 백사실계곡도 가고, 북악산 속을 걸어 춘추관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걸으면서 보는 모든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아렸다. 3년간의 상처가 길에서 치유되고 있었다.
이제 북한산 둘레길에 데뷔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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