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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씨 Aug 23. 2024

맥씨의 Unfortunate Events

“걷린이”의 썰 1 out of 3


드디어 동경하던 북한산 둘레길에 도전하는 날이다.


둘레길 가면서 거창하게 도전씩이나 해야 하나 싶은 분들에게는 존경을 표한다. 둘레길은 싱겁고 산봉우리 하나쯤은 올라야 운동 같아서일 것이다. 부럽고 존경한다. 그들에게 난 초보 “걷린이”다. 이 전에는 그조차도 안 됐으니 난 걷린이란 명칭을 스스로 달고 자부심에 가득 차있다. 북한산을 가기 전 먼저 지난했던 걷린이의 탄생(?) 과정을 소개하려 한다.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팬데믹 초반이었다. 집안에 한 번으로도 감당키 어려운 슬픈 일이 잇달아 터졌다. 전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이었다. 예고된 것과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포함했다. 내 심장을 내어주고 바꿀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지만 하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예상했든 아니었든 슬픔과 충격으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위로는커녕 공격을 당했다. 어제는 고맙다던 사람들이 마음껏 패악을 부렸다. 구시대 유물과 같은 상속법은 공정하지 않았다. 결국 딸들과 나는 상실감에 억울함이 겹쳐 단체로 우울이란 수렁으로 가라앉았다.


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제야 간간이 들리지만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싸우기 바쁜 국회는 나 같은 민초의 억울함을 개선하는 법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그들 자체가 기득권으로서 유물 같은 법의 비호를 받는 집단이라 급할 일이 없을 테니. (ㅋ… 이 글을 쓰면서 국회까지 성토하게 될 줄이야.)


그즈음 생각지도 않던 장애까지 몸을 한계로 내몰았다.  온몸의 힘줄이 한꺼번에 기권을 선언하고 나자빠졌다. 그렇게 두들겨도 버텨? 그럼 이런 고통은 어때. 이러는 거 같았다. 숟가락이 무겁다고 떨어뜨렸고 손가 락 기술의 끝판왕인 젓가락질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1화 <내 모든 힘줄이 항변할 때>) 통증이 잡힌 후에도 무기력함에 잠겨 있었다. 특히나 햇볕을 볼 수 없는 궂은날엔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 끝에 일이 또 터졌다.



공항에서 골절 부상


눈이 온 다음 날 이른 아침, 인천공항 실내 주차장 바닥엔 차바퀴에 묻어와 남겨진 눈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눈이 녹은 물과 녹지 않고 쌓인 눈이 섞여 슬러쉬가 되어 흥건했다. 팔 아프다고 냅두라는 딸을 돕는답시고 차트렁크에서 작은 가방을 꺼내 드는 순간 미끄러졌다. 가방이 5미터는 날아갔다. 가방이 그만큼 날아갈 정도면 넘어질 때 폼이 완전 슬랩스틱 코미디였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재수가 옴팡졌다. 하필 넘어져 발목이 걸친 곳은 차바퀴를 막는 스토퍼였다. 악 소리가 먼저 터져 나온 후 울화가 치밀었다. 순간 2년째 쌓여있던 설움이 터져 버렸다. 딸에게 미안했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얼음물이 흥건한 바닥에 넘어진 자세 그대로 통곡하는 백발의 엄마라니. 딸이 나를 잡아 일으키려 하자 설 수 없음을 알았다.


공항 의료실은 오픈 전이었다. 결정해야 했다. 출국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공항 의료실과 연결하려고 허망하게 시간을 다 써버리고 탑승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야 겨우 체크인 데스크에 도달했다. 데스크에서 내게 탑승할지 말지 결정하라고 준 시간은 단 30초였다. 그것도 화가 났다. 그래 그럼 당신들이 부상당한 나를 감당해 봐. 반은 오기로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딸이 허겁지겁 약국에서 사 온 진통제를 먹었다.


살다 보면 불행한 일이 이것만 있었을까. 고되고 더럽고 아프고 치사한 일은 차고 넘쳤었다. 젊어선 끼니 걱정도 하지 않았던가. 고비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성장했고 어른다워 졌으며 자부심이란 것도 얻었다. 제법 의연해진 줄 알았는데 연속으로 몰아치니 작은 할큄도 많이 아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가 있다. 어린 삼 남매에게 계속 일어나는 불행을 보는 게 지긋지긋해 보다 말았는지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접질렸을 거라 생각했다. 서 보려 해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게 느낌은 좋지 않았다. 발목 주변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도와주려 애쓴 항공사 승무원들께 감사드린다. 좌석 두 개를 비워 다리를 올릴 수 있게 해 줬고 화장실을 갈 때 달려와 부축해 줬다. 얼음 봉지도 요청하는 대로 가져다 주었다. 부어 있는 발에 두른 얼음을 치우면 고통이 밀려와 봉지가 이탈하지 않게 비행 내내 붙잡고 있었던 기억만 선명하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휠체어 서비스를 받아 빠르게 입국게이트로 나갔다. 딸들에게 연락을 받아 걱정이 태산 같았을 남편이 나를 맞이했다. 바로 응급실로 내달렸다. 엑스레이를 보니 발목뼈가 아주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의사가 럭키하다고 했다. 바스러지지 않았으니 수술할 필요 없이 금방 아물거라 했다.


남들은 한 달이면 걷기 시작하던데 영 뼈가 붙지 않았다. 회복 시간이 길어지자 워킹부트(이름은 워킹부트지만 워킹을 하지 못하게 신는 보조기구로 깁스를 대신한다. 이 부트의 장점은 잘 때는 벗을 수 있어 피부 트러블을 줄이고 재활이 쉽다.)를 신은 종아리가 멀쩡한 종아리 굵기의 반으로 줄었다.


그런 중에도 또 다른 보조기구를 차면 집안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균형 잡기 어려웠지만 곧 익숙해졌다. 일층에서 이층으로 계단을 오르내리게 됐다며 자랑도 했다. 목발을 짚을 때 겨드랑이와 손목이 덜 아픈 방법을 찾아낸 작은 일에 기쁨이란 감정이 다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목 골절로 인한 일상의 불편함이 어둡고 답답한 터널에서 나오는 길을 열고 있었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 다시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에 올라 한국에 돌아왔다. 재활을 계속하기 위해 집 근처 병원엘 갔다. 엑스레이와 촉진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역시 뼈가 다 붙지 않았다. 수술했었으면 회복이 한참 빨랐을 거라는데 그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수술이 더 무서우니까. 재활치료를 받으며 많이 걸으란 오더를 받고 의사에게 어린애처럼 말했다.

“걷다가 아프면 중단하래서 별로 안 걸었어요. “

의사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픈 걸 넘어서야 회복합니다.”

넘어서라고...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부축해 번쩍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다. 몇 년간 웅크려져만 있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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