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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계곡

아쿠아슈즈가 가져온 작은 자긍심

by 맥씨


(작년 7월 한가운데)

참으로 덥지만 오늘 날씨는 그러길 바랐던 대로 쨍하니 맑고 더웠다. 오늘의 목적지는 계곡이다. 미리 사 둔 세 모녀의 아쿠아슈즈가 제법 맘에 들어 오늘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여기저기 서울 주변 계곡을 찾아보니 가고 싶은 곳이 많다. 수락산 계곡을 염두에 두었으나 관악산계곡(신림계곡)으로 결정했다. 지척인데 지금껏 가보지 않은 곳이라 궁금했고 모두의 동선의 중간이라 좋았다. 주변에 걷기 좋은 길도 있으니 금상첨화다.


계곡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역시 도시락이 빠질 수 없다. 평소 걷기 나들이에 절대 도시락을 안 싸지만 오늘은 계곡 나들이 아닌가. 기꺼이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그뿐인가 도시락 무게 때문에 대중교통 대신 하기 싫은 운전을 하고 딱 질색인 주차장을 물색하는 불편도 기꺼이 감수한다.


커다란 보냉 도시락 가방에 김밥과 과일과 얼린 물을 담으니 아이들 어렸을 때 소풍 도시락 싸던 생각이 났는데 오늘은 내가 더 신이 났다. 도시락 가방 옆 그물주머니에 이쁜 아쿠아슈즈 두 켤레를 끼워 넣었다. 큰 딸은 미리 가져갔었다.


계곡 하류 관악산공원 바로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무거운 짐은 두고 서울대 앞에서 버스를 탔다. 계곡에 발을 담그기 전 우선 둘레길 한 코스 걷기 위해 시작점으로 간다. 오늘 걸을 곳은 서울대와 맞닿아 있는 서울둘레길 11코스.


완만한 관악산 자락숲은 시원했다. 숲에서 뱀을 만나 놀라며 꺄르륵 여자 셋이 재미지다. 숲길이 어느새 끝나고 서울대 정문 “샤”에 다다른다. 계곡은 관악산공원과 서울대학교 사이를 가르고 있다. 차에서 도시락가방과 기타 물품을 챙겨 계곡으로 향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조차 근사한데 다만 타이밍이 완벽하지 않았다. 공원 곳곳에서 정비 공사 중이었다. 드릴이 드륵드륵 한창 열을 뿜고 있었다. 요란한 기계음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상류로 계속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앉을 곳이 마땅찮고 다시 내려간다면 소음을 피할 수 없었다. 거의 계곡이 끝날 무렵에야 앉을만한 바위를 겨우 만났다.


땀을 닦으며 짐을 풀고 보니, 이런! 아쿠아슈즈가 없다. 도시락 가방 옆 주머니에 두 켤레를 꽂아 두었는데 깔끔히 사라졌다.

돌과 바위가 많아 맨발로 물에 들어가긴 위험해 보이는 곳. 따로 챙긴 큰딸만 신을 갈아 신고 물속에 들어갔다. 시끄러운 기계음에다 예쁜 신을 잃어버린 실망감에 작은 딸과 나는 트레킹화도 벗지 않고 그냥 흐르는 물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본다. 계곡플랜이 실패하고 있었다. 상류여서 흐르는 물의 양은 너무 적었고 건너편엔 어떤 이가 큰 대자로 낮잠을 자고 있다.


이럴 땐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지. 바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야외에서 먹는 밥은 역시 맛있다. 그나마 흐르는 물 덕에 더위가 살짝 가셨다. 김밥을 먹으며 머무는 사이 우리 대화의 주제는 딱 두 가지였다. 밥이 맛있다.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큰 딸의 제안으로 과천계곡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관악산계곡은 관악산 북쪽을 흐르고 과천계곡은 관악산 남쪽을 흐른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선을 길에 꽂고 걸었지만 바닥에 나둥그러진 신발 같은 건 없었다. 차 안에도 없다. 분명히 가지고 나왔으니 잃어버린 건 확실했다. 새 아쿠아슈즈 안녕…


다행히 관악산의 남쪽 계곡은 물도 많고 청량했다. 드디어 맨발을 물에 담근다. 쨍하게 차진 않지만 시원하다. 지나는 차소리가 어렴풋이 들릴만큼 시내에 가까운 곳에서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발을 물에 담그자 금세 송사리가 몰려와 발가락을 쫑쫑 쫀다. 닥터피쉬ㅋㅋ. 맛집으로 소문났는지 곧 떼로 모여든다.

송사리에게 각질을 나누어 주면서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시간도 계절도 아쿠아슈즈도 잊혀졌다. 느껴지는 건 기분 좋게 간질간질한 발가락뿐.


저녁이 되어 귀가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 우연히 아침과 동일한 스팟에 주차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은근 기분이 좋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똭! 주차장 한쪽 벽 아래 가지런히 놓인 아쿠아슈즈 두 켤레! 감탄부터 나왔다. 역시 대한민국.


오늘은 더웠지만 시원했고 마음은 훈훈하다.

그 선행자의 마음도 오늘 하루 훈훈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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