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설렁하자
90% 루미상지 작가님 영향이었다.
흩어져 있는 가족을 챙긴다는 핑계로 한국과 미국을 일 년에 두세 번씩 오가지만 영어로 고생해 본 적은 없었다. 영어는 소싯적 좀 했고 점점 단어를 잊어 이젠 맨날 쓰는 말 외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의사들과 의사소통이 되니 달리 더 필요하지도 않았다. 흐르는 대로 그저 한국에 있을 땐 경치 좋은 곳을 걷는 재미로, 미국에선 남편 밥해주며 에어컨 쌩쌩 트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나쁠 게 없는 듯했다. 게다가 남편이 은퇴하면 한국으로 영구히 돌아갈 예정이다. 그러니 굳이 영어공부를 더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루미상지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부끄러워졌다. 학교에 가는 건 학습이 전부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해 줬다. 마음을 먹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난 절대 외향적이지 않다. 사람들과 두어 시간 주제나 목적이 없는 떠도는 수다를 떨면 이틀은 드러눕는다. 그래도 갱년기를 기점으로 살기가 훨씬 편해지긴 했다. 부끄러움이 뭐였더라, 모르는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말을 건다. 때론 주접스러울 정도다. 생각이 검열 없이 입을 통과한다. 사실 그래서 좋다. 그럼에도 타고난 건 어쩔 수 없어 견인해 주는 뭔가가 없으면 난 그저 내 comfort zone으로 들어가고 만다. “집안에 처박혀 혼자 놀기.”
학교를 견인처로 써보자. 마침 남편이 많이 바빠졌다. 칼퇴근에 목메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 지점 사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느라 낮에도 밤에도 일하게 되었다. 남편이 안 놀아주니 시간이 넘쳐난다. 남편덕(?) 10%다.
마음을 먹었을 때는 등록 기간을 놓쳐 다음 학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몇 달을 기다려 드디어 레벨테스트를 받았다. 최상위 레벨을 받았다. 사실 예상했었다. 일부러 좀 틀릴걸… 몇 문제는 틀린 것 같은데… 결국 디렉터와 이야기해 그 아랫 레벨을 우겨 받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다. 공부를 핑계로 사람을 만나고 외출을 즐길 계획이다. 남편에게 말했다. “절대 열심히 안 할 거야. 그냥 설렁설렁 놀러 다닐래. “ 남편이 픽 웃었다.
2월 드디어 학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둘이다. 학생은 6명으로 전체에서 학생수가 제일 적다. 선생님을 너무 잘 만났다. 발음이 명확한데 속사포처럼 말한다. 듣기 연습에 제격이다. 게다가 수다쟁이라 지치지 않고 이야기해서 너어무 좋다. 살 것 같다. 이웃이었던 제니퍼가 이사 간 이후 오랜만에 영어다운 영어를 들으니 귀가 뻥 뚫리는 기분이다.
학생 구성도 좋다. 콜롬비아에서 온 AI 일을 하는 산티아고는 와이프와 함께 미국에 온 젊은이다. 같은 콜롬비아인이고 사람 좋은 마사는 내 나이 또래인데 영어를 늦게 배워 스페니쉬 액센트가 강해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멕시코에서 온 마리아는 막 결혼한 신혼으로 남편이 미국인이다. 스페니쉬와 불어 과외를 하고 병원에서 봉사도 한다. 제일 바쁘다. 이집트에서 온 바스마는 이집트에서 수학선생님이었는데 한국문화에 흠뻑 빠져 내게 질문이 많다. 두 아이의 엄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통역으로 일하다 파키스탄으로 탈출 후 최근에야 난민으로 입국한 솔로몬. 그는 음식배달을 한다. 그의 영어 발음은 웬만한 미국인보다 훌륭하다. 정말 완벽한 발음을 구사한다.
이들에 비하면 나의 영어는 정말 초라하다. 학생 중 나와 마사를 제외한 모든 이가 미국에 온 지 육칠 개월이라니 그들의 영어실력에 혀가 내둘러진다. 지금 내가 그들보다 좀 더 자연스러운 영어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들의 일 년 후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진 영어를 구사하고 있을 것임을 난 경험적으로 안다. 특히 스페니쉬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일정 수준이 지나면 그 후론 일취월장하게 된다. 그들은 오히려 짧은 단어에서 막힌다. 우리처럼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단어가 길어질수록 영어와 맥락과 발음이 비슷해질 때가 많아서 급속도로 영어가 는다. 우리는 계속 새로운 단어를 죽어라 외워야 할 때 말이다.
설렁설렁 다닐 거라 했는데 막상 들춰 보니 잊은 게 너무 많아 아뿔싸 “공부”가 필요하다. 더구나 요즘 기억력이 바닥이라 더욱 그렇다. 몇 분 전 들은 게 기억나지 않는 게 다반사다. 귀와 입으로 공부하는 게 언어공부엔 최고지만 내 나이엔 손글씨를 쓰는 게 두뇌 건강에 좋다고 누가 그러더라. 귀가 혹해져서 고전적인 방법으로 공부한다. 그 옛날 주입식 교육이라며 그렇게 미워했던 방법, 손으로 열심히 필사 중이다. 손으로 글씨를 써본 게 얼마만인지. 나름 재밌다. 잊었던 문법이나 단어들을 다시 마주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한편 다시 생각나서 기쁘고, 이런 것조차 잊어버렸었다는 게 기가 막히고, 이제 다시 기억난 것 같았는데 다음날 다시 잊어버렸음에 절망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설렁설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