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러시아인 여행객의 이유 있는 안달

역시 대한민국!

by 맥씨


역시 대한민국! 인 사건을 하나 더 소개하련다.

작년 봄이었다. 베프와 함께 거제도에 가려고 아침 일찍 부산행 KTX를 탔을 때였다. (그 베프 맞다. 수년 전 암에 걸려 수술과 항암을 이겨낸, 그걸 지켜보느라 일 년 넘게 미국에 안 들어가서 세컨드룸을 경험했다가 대강이 덕에 무사히 빠져나온 … )

조용한 기차 안에서 수다를 떨 수 없으니 그냥 쉬며 가는 중이었는데, 젊은 외국인 여인 한 명이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내가 바깥쪽에 앉은 터였다. 도와줄 수 있냐기에 그러자며 이야기를 들으려 일어나 이끄는 대로 기차 칸 사이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상기된 표정의 또래 외국인 여인이 한 명 더 그리고 객차승무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여인은 러시아인 관광객이었다. 관광차 부산을 가는 중인데 묵었던 서울 동대문 호텔에서 서울역까지 탄 택시에 백팩을 놓고 내려 사색이 되어 있었다. 기차를 탈 때까지 그걸 몰랐다니 그게 신기했다.


승무원의 설명을 들었다. 잘 해결해 주신 것으로 사료되어 내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이미 승무원이 그들에게 했었을 것 같은 말을 다시 해주고 떠나려는데 이 여인들의 안달이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고 있었다. 승무원의 영어도 훌륭해서 잘 설명하고 있었고 이미 택시기사와 통화도 했고 택시기사는 자기 위치에서 서울역까지 다시 가야 하는 비용 3만 원을 요구했고, 영업을 잠시 멈추고 주차하고 분실물 센터로 시간을 들여 이동해야 하는 기사에겐 이유 있는 요구였고, 그렇게 그들의 백팩은 서울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승무원의 조치는 그다음에 더욱 빛났는데 서울역 분실물 센터에 백팩이 도달하면 그녀들의 승차권과 연계해서 엑스트라 차지 없이 다음 기차에 싣고 부산역 분실물센터에서 픽업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 일머리가 반짝이는 건 물론이고 영어도 잘하는 한국인 일꾼을 보는데 황홀감까지 느꼈었다. 후련함이기도 했다. 그렇지. 일은 이렇게 하는 거지. 미국? 어디에서 그런 안전하고 신속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불법입국자는 아닌지 너부터 검사하자고 난리였을 게다. 택시에 놓고 내린 백팩? 아예 찾을 생각을 버리는 게 낫지. 신고를 하려면 사건이 발생한 해당 도시 관할 경찰서를 가야 했을 거고 그 정도는 콧방귀도 안 뀌는 경찰서에서 (만약 운이 엄청 좋아서) 찾는 시늉이라도 해준다면 글쎄… 그래도 빈 가방조차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약 일 년 후쯤 통보받을 것이다. 러시아도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사려 깊게 속전속결해 주었는데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불만 가득한 이 여인들의 문제가 뭐지?

여러 질문을 하고 그들의 대답을 조합해 보니 내 생각이 지극히 한국적(?) 사고였단 걸 깨달았다. 그들의 걱정은 그 백팩에 넣어둔 자기들의 여권과 전재산이 든 지갑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자기들 생각에 택시기사나 회수 과정에 개입한 사람들이 그것들을 “당연히” 가져가고 가방만 돌려줄 거라는 생각에 불안해 미칠 지경인 것이었다. 그들이 계속 안달하며 승무원을 놓아주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들의 진짜 걱정을 알고는 주저 없이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속으로 자긍심이 뿜뿜 올라왔다.

“얘들아 잘 들어. 너희는 지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있어. 택시기사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서울역까지 가고 있잖니. 또한 한국 어디에서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모든 게 고스란히 네게 돌아올 거니까 승무원의 말대로 하면 돼. 여기는 안전한 한국이라고.”

단호하기까지 했던 나의 말을 듣고 그들의 눈이 동그래졌으며 곧 포기인지 희망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은 표정이 안정되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불안하겠지. 신분과 전재산이 혼자 밖을 떠돌고 있는데. 그 불안감은 그들의 몫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베프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러시아인에게는 우리의 당연함이 이해가 안되는 것 같다며 궁금해하던 베프와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프는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수많은 승객 중 어떻게 영어 할 줄 아는 나를 콕 집어 도움을 요청했는지 그게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떤다. 친구의 궁금증이 이해도 되는 것이 그 러시아여인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다른 이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십 분쯤 후 그 여인이 다시 와서 백팩이 서울역에 도달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다. 그날이 출국이라 서울에 남아 있던 동료가 공항으로 가기 전에 서울역분실물센터에 가는 수고를 해 주었고 백팩이 고스란히 안전함을 확인해 주었단다. 이 모든 순간에 열심히 전화를 돌렸을 승무원의 수고가 느껴졌다. 뭔가로 보답하고 싶다는 걸 사양했다. 이제야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아름다웠다. 이때 옆자리에 앉은 베프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찌 내 친구를 콕 집어 도움을 청했냐고.

대답이 더 재밌다. 그냥...이라고 대답하며 눈이 동그래진다. 하하. 아마도 한국에서 언어로 고생해 본 적이 없었나 보다.


부산역에 도착해 분실물 센터를 찾아가는 그녀들이 밝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재차 건네고 총총 사라져 갔다. 우리는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남아 부산역사를 구경하는데 그들도 역사를 구경하며 여유로히 거니는 모습이 보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