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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Aug 28. 2017

캄보디아, 국경 넘어 힌두의 세계까지 #1

"이 호수를 건너면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 카페 미야 #9


 뿌리 뻗듯 자라나는 강줄기와 뼈대가 앙상하게 솟은 산맥 사이로 만만히 보인다 싶은 곳에 여지없이 자리를 잡은 마을들을 바라볼 때에도, 한없이 보드라울 것 같은 구름 위로 미끈하게 흘러갈 때에도, 내가 몸을 구겨넣고 앉아 있는 곳이 실은 800km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순간이동처럼 느끼곤 했다. 그러한 이유로 점차 여행력이 깊어질수록 ‘순간이동’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걸어서 국경을 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허술한 울타리 하나 두고 출국 도장하나, 입국 도장 하나 차례로 받는 것이 도통 소꿉놀이 같기만 한데, 근엄한 표정으로 내 여권을 촤르르 넘겨보다 도장을 쾅! 찍는 몇 초의 긴장도, 몇 발짝 건너왔을 뿐인데 사는 모습, 차림새, 언어, 제스처까지 달라지는 변화를 하나씩 발견하는 즐거움도 퍽 짜릿했다.



 내가 처음으로 걸어서 국경을 넘었던 것은 10년 전, 캄보디아가 처음이었다. 당시 앙코르왓이 넘치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유적 보호 차원으로 곧 폐쇄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태국 여행 중에 충동적으로 앙코르왓을 끼워 넣었다. 딱 4일 동안 앙코르왓만 둘러보고 다시 방콕으로 돌아오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육로로 카지노 버스를 타고 국경까지 가서 출입국 심사를 거친 후 합승 택시를 구해 씨엠립까지 들어가기로 했다.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카지노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일생을 카지노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을 것 같은 차림새였다. 과일 광주리며 잡동사니 가득한 가방이며 다들 새벽부터 생업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었다.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내리 달리던 버스는 휑한 공터에서 덜덜대던 엔진을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한 꼬마 녀석이 짐칸에서 내 가방을 꺼내 쥐고 있었다. 깜짝 놀라는 내게 손가락을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 녀석이 데려간 곳은 태국의 출입국 심사소. 여권에 출국 도장을 받고 나오니, 내 걸음을 재촉하며 한발 앞서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를 솜씨 좋게 비집고 나갔다. 나무 수레와 사람들이 뒤엉킨 관문에는 보무도 당당한 그 이름, Kingdom of Cambodia가 새겨져 있었다.


캄보디아 관문으로 향하는 태국의 그 녀석.


 문 하나를 두고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잘 닦여있던 도로는 흙길로 바뀌고, 낮은 판자촌이 죽 늘어섰다. 출입국관리소에 ‘Visa fee $20’라고 버젓이 쓰여 있는데도 공무원이라는 작자는 40달러를 요구했다. 얄팍한 주머니 사정보다 그 뻔뻔함이 얄미워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25달러로 낙찰을 보고나서야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덩달아 눈을 부라리며 곁을 지키던 꼬마 녀석은 제 할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내게 가방을 건넨다. 성의 표시로 1달러를 내밀었더니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는다. 기특한 녀석, 하고 돌아서려는데 내 옷깃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린다.


 “태국 서비스 1달러, 캄보디아 서비스 1달러” 


 요 녀석 봐라. 그 영악함이 한편 대견하여 옛다, 2달러를 쥐어주니 녀석은 그 돈을 얼른 낚아채고는 엉덩이 씰룩대며 국경을 넘어 돌아갔다. 피식 웃으며 가방을 끌고 캄보디아 땅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딱 그 녀석 나이로 보이는 한 소년이 다짜고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 손 싹싹 빌기까지 했다. 무릎을 꿇다니, 차라리 태국 아이처럼 영악하게 등을 치던지! 뻔뻔하게 뇌물을 요구하는 공무원, 생면부지 관광객 앞에 아이를 무릎 꿇게 하는 나라. 캄보디아의 국경 풍경은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캄보디아 국경.


 씨엠립까지 달리는 길은 앙다문 이가 부딪힐 정도로 사나웠다. 사막의 폭풍이라도 만난 듯 흙먼지가 택시를 덮었다. 이따금 지나치는 트럭에는 족히 50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아슬아슬 매달려 있었다. 놀람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다보는 나에게 그들은 손 흔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렇게 달리기를 네 시간, 제법 번화한 거리가 나타났다. 호텔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던 택시 기사는 어느 툭툭이 기사한테 돈을 얼마간 주더니 길 한복판에 나를 내려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씨엠립으로 가는 길.


 쨍하던 하늘이 금세 어두워졌다. 숫제 양동이로 들이 붓는 것처럼 비가 떨어지고…, 잠깐 기다리라던 툭툭이 기사는 어디로 갔을까. 도리 없이 툭툭이에 올라 앉아 비를 피하는데 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온다. 


 “잠깐 같이 앉아도 될까요? 비가 너무 많이 오네요.”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제일 위험한 것은 역시 사람인지라, 낯선 사람을 대할 때는 쉽사리 믿지 못하고 관상까지 볼 기세로 오감을 곤두세운다. 말투와 인상을 보니 적어도 뒤통수 칠 인간은 아닌 듯, 좁은 툭툭이 안에 마주앉아 할 말도 없어 그저 내리 쏟는 비를 바라봤다. 한참을 내리치던 비는 수도꼭지를 잠근 듯 빗방울 몇 개 똑똑 나리더니 이내 멈췄다. 툭툭이 기사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그냥 제가 데려다드릴까요? 저도 툭툭이 기사에요.”


 툭툭이 기사 재키를 그렇게 만났다.


툭툭이 기사, 재키의 뒷모습.


 “이 호수를 건너면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하루가 아쉬웠던 나는 호텔에 짐을 던져두고 앙코르 왓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빽빽한 숲이었는데, 신기루처럼 직사각형 반듯한 호수가 나타났다. 재키는 호수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도로를 따라 몇 겹의 문을 통과하여야 닿을 수 있는 웅장한 다섯 개의 탑으로 구성된 앙코르왓은 힌두 세계관을 정확히 구현해 놓은 건축물이라 했다.


인공호수와 앙코르왓 전경.


 태초의 바다를 상징하는 호수를 지나 한참 걸어 들어가면 “Welcome to Hindu world”라고 말하는 듯 힌두 신화를 펼쳐놓은 회랑과 마주한다. 그중 압권은 힌두의 창제 신화를 그리고 있는 “젖의 바다 휘젓기(Churning of the Ocean of Milk)”이다. 태초에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들은 영생의 약을 얻기 위해 악신 아수라와 손을 잡고, 만다라 산을 뽑아 거대한 뱀 바수키에 묶어 천 년 동안 광활한 젖의 바다를 휘젓는다. 혼돈의 심연에서 생명의 어머니인 암소, 밤하늘의 달, 행운의 여신 락시미, 생명의 여신 수라비, 술의 여신 바로니, 천상의 무희 압사라 등 무수한 신과 생명이 탄생했다. 수천 명의 사람과 신과 동물이 등장하는 회랑의 부조는 마치 돌 안에 더운 피가 흐르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젖의 바다 휘젓기 ⓒMarkalexander100


 생명 탄생의 혼돈은 인간계와 신계가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우주의 중심, 다섯 개의 메루산에서 정점에 이른다. 앙코르 유적의 가장 빼어난 건축물인 다섯 개의 탑은 30년 동안 증축을 거듭하면서도 대칭과 배치, 구조가 초기의 설계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도 이곳에서는 무색하다. 이 땅의 사람들은 이러한 거대한 세계를 품고, 정교한 건축물로 재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씁쓸하게도 국경에서 내게 무릎을 꿇던 아이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회랑의 부조와 벽화들.


 가파른 계단을 엉금엉금 기어올라 탑의 3층 난간에 앉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발아래 펼쳐진 푸른 숲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저 멀리 사흘 간 누비게 될 사원들을 가늠하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설레는 마음도 잠깐, 돈 걱정이 밀려들었다. 빠듯한 예산에 맞춰 달러를 가져왔는데, 입장료를 깜빡하고 계산에 넣지 않았다. 20달러를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46달러. 현금인출기도 없고, 카드 결제는 상상도 못할 일. 하루 생활비를 7달러로 해결해야 재키에게 수고비를 줄 수가 있었다. 그것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앙코르왓에 어둠이 깔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터덜터덜 나오는데, 재키는 이런 속도 모르고 웃으면서 나를 맞이한다.


 “내가 돈이 이것 밖에 없는데…, 그래도 나를 데리고 다녀줄 수 있어요?”


 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재키. 


 “돈 얘기는 나중에 해요. 이제 어디 가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귀가 빨개진 적은 없었다. 25달러를 내밀고 있는 손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배가 고파요.”


 “그럼 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툭툭이의 시동이 걸렸다. 나는 어둑한 흙길에 내맡겨져 그들이 내키는 만큼 덜컹대고 있었다.



Part II :

https://brunch.co.kr/@magazinebricks/113




글/사진(1-8, 10-13)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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