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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an 27. 2018

양지서적

서점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엔 동네에 고만고만한 크기의 서점이 서넛 있었다. 진열창에 놓은 책들은 서점마다 비슷해도 그 안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도대체 누가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서적들이 빽빽하게 책장을 가득 채운 곳이 있었고, 반면에 문구와 완구도 취급하는 종합서점의 성격을 가진 곳도 있었다. 아직 일본의 만화책 단행본이 정식으로 발간되지 않았던 시절, 소위 해적판이라고 불리는 만화책이 쏟아졌을 때 한 곳의 서점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 이름이 양지서적이다. 양지서적은 볕이 잘 드는 동네의 중심에 있었다.


 아버지가 첫 생일 선물로 ‘월간 보물섬’을 구입해주신 곳이기도 하고, 자전거 사고로 크게 병원 신세를 지고 퇴원했을 때 큰아버지와 함께 ‘건담 로봇’을 선물로 골랐던 특별한 기억도 있는 곳이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하던 서점이었다. 그런데 양지서적의 출입은 어느 시점에 자연스럽게 뚝 끊겨버렸다. 컴퓨터가 보급되고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일까, 아니면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등장 때문인 것일까. 어느새 다른 서점은 없어지고 양지서적만 유일하게 남았다.


 양지서적은 한자리에 오래 있었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맞은편 양지서적의 문이 열려 있었다. 아저씨는 책을 읽고 있었다. 작은 공간에 학생을 위한 참고서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렇게 예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아저씨는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일까.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양지서적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아저씨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 가끔 문을 열어두었다.



 금호동은 꽤 오랫동안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양지서적도 한 번 자리를 옮겼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옮겼던 곳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간 자리라 눈에 더 띄지 않았다. 별다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즈음 헌책방에서 일을 했다. 일반적인 헌책방과는 달리 인터넷으로 책을 판매하면서 꽤 많은 직원을 두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엄청나게 들어오는 중고 도서를 한정된 공간에 채우고 또 채웠다. 전구가 꺼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공간에서 책들을 더듬었다. 지쳐버렸고, 제대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밥벌이를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큰 서점을 다니다가 이제는 직접 책방을 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헌책방은 재개발로 떠나버렸다.


 책방을 차릴 때 제일 고려한 것은 볕이 잘 드는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양지서적의 영향을 조금은 받은 것 같다. 내가 일했던 서점은 지하여서 지나치게 밝거나 어두웠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과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기울어진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하다. 볕을 쬐고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천천히 느낀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서점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따뜻한 볕 때문에.



 그렇지만 동네에서 책방을 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돈을 얻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계의 부담은 지지 않았으면 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글을 쓰는 것과 책을 파는 것 중에 하나는 나아지길 바랐다. 어릴 적 양지서적을 드나들면서 느꼈던 볕의 평온함을 누군가도 기억하고 있다면 서점은 계속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한 평생을 간판을 만들면서 보냈다. 금호동 일대의 건물이라면 올라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가끔 아버지를 따라서 일을 돕기도 했다. 간판을 올리기 위해 세워진 사다리를 붙잡거나 필요한 공구를 옆에서 건네주는 보조적인 역할도 했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간판을 올리기 위해 줄을 끌어당기기도 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이번에도 나를 불렀다. 사실 이 일을 더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늙었고, 가게도 꽤 오래전에 접었다. 이렇게 일이 들어온 것은 아직도 누군가는 한 동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출을 받아 간 곳은 바로 양지서적이었다.


 이미 서점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뜯겨진 광고지 몇 장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예상했던 결과여서 무덤덤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간판은 힘들이지 않고 쉽게 뗐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빈 공간이 되었다. 유리창에는 브로마이드와 도서 광고지가 바랜 채 덕지덕지 붙어서 지난 흔적으로 남았다. 그 광고지가 온 몸으로 서점 안으로 들어오는 볕을 막고 있었다. 이렇게 날이 밝은데 살짝 어두운 빈 공간을 보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떠올라 잠깐 울컥했다.


 사람들이 책을 잘 볼 수 있도록 진열창의 테이블에 책을 놓아두지만 어느새 바래진 책들은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책들을 두고 나는 어쩔 줄 모른다.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가 내 앞에서 양지서적의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양지서적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슬프게 했다.



 일주일 후에 아버지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간판을 달러 간다고 했다. 일전에 뗀 양지서적의 간판을 새롭게 바꾸어 그 자리에 다시 다는 줄 알았다. 당연히 다른 업종의 간판일줄 알았는데 ‘책’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고 ‘365일 할인판매’가 책이라는 글자를 보조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간판을 달러 간 곳은 이전의 양지서적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의 지하 공간이었다. 양지서적은 없어지지 않고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간판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자리를 옮기고 좀 더 책을 열심히 파려는 의욕이 드러난 것일까. 한편으론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양지서적이라는 이름을 간판으로 쓸 수 없는 슬픈 운명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간판을 달고 나오는 입구 한 쪽에 조그맣게 쓴 양지라는 글자만 볕을 받아 빛났다.





글/사진(1-3) 박성민 / 사진(4-5) 베르고트


동네에 차린 책방 <프루스트의 서재>를 개인의 서재로 쓰면서 글도 씁니다.

https://www.instagram.com/library_of_pro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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