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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an 20. 2018

목적 없이 머물려고

태어나니 광주였고, 살다 보니 광주였다.

 나는 언제든 떠날 사람이었다. 서울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랬다. 지냈으나 머물지 못했다. ‘이 시기를 버텨내면 광주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고등학교 3년을 버텼지만, 열아홉의 그 패기는 움직일 공간 없이 딱 붙어 선 만원 전철 속 사람들의 땀 냄새에 잊힌 지 오래였다. 졸업은 가까워 오는데 취업도 안(못) 했고, 토익 점수도 못 만들었고, 마땅한 자격증도 없었다. 궁극에는, 연애에도 실패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내려가면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어려울지 몰라.”


 현실적인 조언은 칼날이었지만 관통에는 실패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쿨하게 서울을 떠났다. 목적이나 준비가 없는 사람이 무작정 비벼 보기에 서울은 매서운 곳이었다. 어떠한 목적이 없어도 되는, 그러니까 뭘 안 해도 되는 ‘우리 동네’로 도피해야만 했다. 스무 살의 어린 후회가 곳곳에 스민 한남동도, 거주했던 성내동도 아니었다. 광주였다.


 현재 광주의 서비스업 종사자는 전체 근로자의 70%가 넘으며 최근 3년 동안 인구가 한 해 평균 2천 명씩 줄어들었다거나, 민주화운동으로 남은 흉터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풀어 나가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거나, 아파트 단지들이 어딘가에 늘 건설되고 있으나 몇 억이 있어야 살 수 있다거나, 주 6일 근무를 요구하거나, 연봉이 채 2천만 원이 되지 않는 일자리도 수두룩하다거나, 이런 얘기는 이쯤에서 갈무리. 어떤 장면들이 어딘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게 붙어 있는 장면들은 좋았거나 슬펐거나 놀랐거나 비참했거나 하는 감정변화의 폭에 기민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위의 팩트들과 결을 달리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90년대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학생들에겐 방학 때 숙제로 나오는 한 권의 <방학생활>은 일명 누가 누가 두껍게 만드느냐 콘테스트였다. 우리 학교가 유별났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붙이고, 체험 기록을 끼우고, 색색깔 사인펜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빼곡하게 글씨를 채워 넣는 정성만이 상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반의 환경 미화를 독차지하는 친구를 꾀어 같이 <방학생활> 꾸미기를 하자고 했다. 친구의 집은 전남대학교 정문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우리 집에서 10분은 넘게 걸어가야 했다.


 넓은 도로를 지나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두 번,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 도착한 친구의 집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책의 두께가 두 배 정도 늘어났다. 이 정도면 바로 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뿌듯함을 어깨에 얹고는, 가지고 온 도구들과 책을 챙겼다.


 “잠깐만 있어 봐.”


 친구가 욕실에서 치약을 가지고 나와 내 손가락에 짜주었다. 나는 치약을 양 눈 밑과 인중에 가로로 길게 발랐다. 도로가 뿌옜다. 손으로 입을 가린 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매캐한 최루탄의 냄새가 손가락 새로 새어 들어왔다. 누군가는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기다리며 지구 멸망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집이 가까웠던 탓에 전남대학교는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배경이다. 초등학생 땐 100원짜리 스티커 서너 장을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고르던 대형 팬시점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스무 살 땐 적은 금액에도 안주가 푸짐하게 나오는 호프집이, 대학생이 되어선 ‘내일로’ 상품으로 처음 광주를 방문한 친구를 데려 간 상추튀김집이 모두 전남대학교 후문에 있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이 경험이 주는 강렬함과 시간의 누적에 기인한다고 했을 때, 내 세계는 분명 그곳 어딘가에 일정 부분 멈춰 있다.


 그 시절 광주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 준 운암동의 어린이 대공원은 겨울을 제외한 온 계절, 우리 가족의 단골 사진 촬영 장소였다. 특히 개나리나 철쭉이 만개한 때면 자동 필름카메라를 들고 부모님의 뷰파인더 너머로 이런 저런 포즈들을 취하곤 했다. 1년에 한 번씩 낙안읍성이나 변산반도, 전남 지역의 해수욕장 같은 데를 가족 여행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가까우면 전남, 멀면 전북이었다. 그 이상을 시도하진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광주천


 광주를 굳건하게 지키던 화니백화점과 가든백화점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대형 백화점들이 문을 열었다. 학교마다 비슷한 소풍 일정 덕에 날이 좋은 소풍철만 되면 패밀리랜드는 광주와 인근 전남 지역 학생들의 대규모 화합 장소가 되었다. 칠이 벗겨지고 빛바랜 놀이 공원에서 바쁜 엄마를 대신해 큰 고모가 싸준 김밥을 먹었고,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겨우 탄 씽씽보트는, 그렇기에 3분 남짓의 짜릿함을 한껏 오버하며 즐겼다. 우리 중학교는 금남로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충장로로 나가 여인천하나 타임존 같은 데서 쇼핑을 했다. 친구들과 곰이네 분식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은 뒤 노란 가발을 쓰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 오는 날이면 금기를 깬 것 마냥 설레어 잠을 설쳤다. 지금도 시험 기간이 끝난 충장로는 학생들로 넘쳐 난다. 게 중 나와 똑같이 생긴 학생을 가끔 발견한다. 


 그리고 사실, 안다.


 광주라는 두 글자를 지우고 성남이나 대전, 춘천 같은 도시 명을 넣어도 이 이야기들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걸.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다시 광주로 돌아와야만 했던 그 무엇이란 없었다, 고. 태어나니 광주였고, 살다보니 광주였다. 내가 나의 삶을 직접 결정하지 못했듯, ‘그냥 광주였다’, 이런 무책임한 문장만 내뱉는다. ‘우리’란 단어가 붙은 모든 것에 같은 변명을 해야겠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 나라. 태어나 살다보니 우리가 되어 있었다.


하늘마당


 요즘 광주는 좀 핫하다. 이태원에서 줄 서서 먹는다는 피자를 그곳 출신 셰프가 차린 양림동의 식당에서 먹을 수 있고, 경리단길에서 유명하다는 식당이 동명동에도 생겼다. 도산공원에서 줄을 서서 먹는 빵집은 대의동에 지점을 냈다. 광주에서 먼저 시작되거나 여기만의 특색을 갖춘 상점들도 많아졌다. 시간차는 있지만 서울과 수도권에서 유명해진 프랜차이즈들은 금세 광주에 문을 연다. 서울에 가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나를 들볶았던 TV는 아직도 모든 게 서울 위주지만, 지역과 나라의 경계가 무너진 SNS의 활성화로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되는 곳들이 광주에 넘쳐난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동명동과 양림동으로 몰려들고, 그곳의 오래된 주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주택의 구조를 그대로 살린 식당으로 변신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동명동과 양림동이 가까운 구도심 충장로와 금남로는 약화된 상권이 다시 살아나는 추세다. 오래된 먹자골목 대인동도 그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하늘마당엔 저녁마다 맥주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숫자가 장관을 이룬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놓은 채 짙어가는 하늘색을 오롯이 톺아보고 있노라면, 이곳을 연남동의 연트럴파크가 아닌 런던의 프림로즈힐에 비해야 한다고 감히 우겨본다.


광천 터미널 유스퀘어


 내가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광주의 폭은 나이 든 선배의 폭과 다르고, 나와 똑같이 생긴 학생의 폭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건 일부의 이야기라 칭해야겠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일부와 일부들이 일부를 이루고, 그런 일부와 일부들이 일부의 일부로 사는 일.


 운이 좋게도 나는 전공을 살려 이곳에서 취업을 했다. 광주가 배경이 되고 사건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야만 하는 곳이다. 이쯤 되면 운명이라 해야겠다. 시간을 지나고 공간을 건너 기억과 경험을 먼지처럼 붙여가며 광주의 남은 폭들을 기꺼이 품에 안아 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 광주가 되어 갈 거다.





글/사진 백지은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쓴다. 광주MBC에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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