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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an 13. 2018

내가 본 불꽃은 축복이었을까

그들이 독립기념일마다 쏘아 올리던 불꽃, 그들의 놀이

 잭슨, 스탠리, 카일, 어린 시절 책상을 나란히 했던 이국 소년의 이름은 아니지만. 드물게 섞여 놀던 피부 검은 아이들의 이름은 나와 같은 멋없는 세 글자였지만. 라 과디아, 레드 클라우드, 이런 멋스런 이름들 아직 기억하는 건 그런 이름의 커다란 담벼락들이 내가 자라난 세계의 경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학교에 다니든 한 번은 미군부대 담장을 지나야 했고, 반 친구 한두 명은 미군부대 군속의 자녀들이었다. 의식 않고 살아왔어도, 내가 살던 동네를 어디 먼 데서는 기지촌이라 불렀을 것이다.


 수제 햄버거를 굽는 아저씨와 시나몬 향이 나는 도넛을 튀기는 아줌마가 이웃에 살았고, 경계의 문이 열리던 카니발에는 한 아름에 안을 수 없는 커다란 피자를 구경만 할 수 있었다. 헬기가 뜨고 내릴 때 텔레비전 화면이 자꾸만 위로, 위로 넘어가는 것을 무던히 바라보며, 난시청지역이 다 이렇지 뭐, 조숙한 언어를 구사했어도, 영어시험은 번번이 어려웠다. 아침이면 구보하는 미군들의 노래 소리, 사이렌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박쥐를 입에 문 엘리스 쿠퍼의 음반이든, 벌거벗은 여자가 하나 가득한 레드 제플린의 음반이든 부대 앞 복사 레코드 가게에선 천 원이면 구하지 못 할 카세트테이프가 없었다. 그 양 옆으로는 내국인출입금지 푯말을 단 술집들이 버드와이저의 빨간 포스터를 붙여 놓고 있었다. 누구네 몇 째 딸이 미군과 결혼을 했다거나, 양색시였던 누구 아줌마가 미국 가 살다 이혼하고 돌아왔다거나, 머리가 노란 그 집 딸이 별스럽게 예쁘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그다지 별스러울 게 없는 동네였다. 군인들이 훈련 나가 먹는다는 C-레이션이 어떤 경로였을까,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고, 그 안에 든 초콜릿, 닭고기 수프, 퍽퍽한 비스킷. 의정부에 처음 이사 온 날도 교회 첨탑 저 멀리서 폭죽이 터지던, 담벼락 경계 안 사람들의 기념일이었다. 


90년대 초까지는 이런 미군 전용 클럽이 많았다. 한국인은 출입이 금지된 데다 미성년자라 가게 안을 본 적은 없었다.


 지상으로밖에 지나지 않으면서 뻔뻔스럽게 지하철 1호선이라 불리는 철로가 의정부 땅의 남북을 관통하고, 철로를 가운데 두고 서쪽 동네에는 미군부대가, 동쪽 동네에는 상업 시설과 관공서들, 시내를 들고 나는 사방 도로에는 탱크 방어선이라 불리는 커다란 인공 시멘트 터널이 있었다. 그 앞 검문소는 교복을 입지 않은 남자학생들에게 강제 하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관문이었다. 버스 뒷자리에 앉아 말보로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더딘 성장을 애달아하던 불한당들도 버스에 올라탄 헌병 앞에선 맑고 철없는 아이의 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역 앞 홀링워터 부대의 PX는 내국인출입을 금지하지 않았다. 영어 이름이 박힌 막대사탕과 초콜릿, 과자, 소시지 들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 가판대에 나란히 나란히 놓여 있었고, 어딘가에는 그곳에서 장을 보는 가족들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내 주변에는 시멘트와 흙바닥에 물고랑이 파인 의정부 제일시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뿐이라, 내 기억은 대개 그곳에서 자라났다.

 

ⓒ정운현 작가 블로그(http://blog.ohmynews.com/jeongwh59/330459)
의정부 역 앞, 캠프 홀링워터가 떠난 자리는 토양 오염이 심각했다. 게다가 얼마 전 공원을 조성하며 중국에서 안중근 동상 제작을 의뢰했는데, 전혀 닮지 않은 동상이 도착했다.


 의정부 제일시장은 1954년 미군 PX에서 빼돌린 물건들을 알음알음 사고파는 사람들이 몰래몰래 모이던 곳에, 농사짓는 사람, 옷 파는 사람, 소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1959년부터 아예 상설시장이 되었다. 1976년 지금의 부지를 사들여 시장을 건축했고, 2005년 아케이드 지붕을 올리고 이곳저곳 대폭 손을 대면서 이때껏 모진 대형마트 시대를 어렵사리 버텨내고 있다.


 오래 전 합법이 된 수입 상가들은 아직도 PX에서 몰래 빼 온 물건을 파는 게 아닐 까, 묘한 설렘을 조장한다. 떳떳하지 않을 것도 없는 설렘을 안고 시장 지하로 내려가면 이 도시에서 자란 거의 모든 남자 아이들이 처음 술을 배우던, 아니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으니 알아서 습득하던 지하시장이 어느 때든 위세 좋게 음식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나도 그곳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라면으로 뒤를 받치고 소주를 마셨고, 누군가가 조숙한 표정을 짓고서 구해 온 버드와이저를 계단 구석에 숨어 폼 나게 마셨다. 하지만 고등학생 정도 되고 나면 풀어야 할 회포가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런 날의 메뉴라면 역시 부대찌개여야 했다.



 의정부에 가보지도 않고 거기 부대찌개 말고 뭐 있냐 말하는 사람들의 혜안은 그것대로 탁월하지만, 부대찌개면 됐지 뭘 또, 한 치 물러설 마음도 없는 것은 먹으면서 함께 자라난 배포 탓이다. 한글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작자와 제자원리, 창작 시기가 명문화된 문자라면, 부대찌개는 한국 음식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 끓인 사람과 첫 냄비가 끓던 장소가 기록에 남아 있는 음식이다.(<아침마당> 2003년 1월 13일 방송, 『식객』 2권에 기록된 바…)


 부대찌개를 파는 골목 역시 제일시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이름답게 미군부대와의 연이 아니고선 만들어질 수 없던 음식이다. 햄버거를 만드는 다진 고기와 염도 높은 소시지에 김치를 한 데 넣고 끓여 부대찌개를 창조하시었던 허기숙 할머니가 처음 냄비를 올리셨던 장소, 오뎅식당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워낙에 손님이 많아 과한 반주를 금지하는 곳이라 오늘 여기 터를 잡겠다 싶은 심정일 때는, 사실 그런 때가 대부분이라 다른 식당을 간다. 일테면 경원식당이나 형네식당 같은 곳.



 불행하진 않았지만, 이 기억들을 행복하게 떠올려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캠프 잭슨과 스탠리는 핵이 배치되었다는 소문에 싸여 그 시절 내 또래들의 헤아림 너머 커다란 정치적 군사적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미군부대가 떠나간 자리에 생겨난 도서관과 농구장에서 내가 흑인 병사와 농구를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책상에 앉아 열렬하게 상경의 날을 고대하던 동안에도 기지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하나 같이 흉악했다. 그곳에서 일하던 누나들, 아줌마들, 그 안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두레방이란 단체가 얼마나 외롭고 혹독하게 현실과 싸우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피해자가 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랬다. 미군도, 전쟁도, 기지촌도. 그곳은 조깅 나온 병사와 스스럼없이 헬로우를 나누는 위아더월드, 잭슨, 스텐리, 레드 클라우드라는 쿨한 이름 틈에 낀 코리아타운이었다. 미선, 효순이라는 순박한 이름의 중학생에 돌진하던 장갑차 운전사는 나와 함께 농구하던 흑인 병사의 동료였고, 그 날도 별 일 없이 잠들었겠지만, 의경으로 복무하던 나의 친구들은 어린 동생들이 아닌 미군 부대 담장을 지키며 잠을 설쳤다. 세콤보다 못한 장비를 걸쳐 주고 제 몸보다 세 배 큰 미군 병사를 지켜주라 국도변에 내팽개쳐졌던 것이다. 시내 곳곳을 막아선 미군기지 담장을 지나게 될 때마다 아이들의 기억이 끄집어 올려지던 이유는 단지 그 때문이었다. 나를 키운 세상이 지금껏 내게 남겨둔 표식이 그 기억과 고리 지어져 있으므로. 하지만 나이 들고 기억할 게 많아지면서부터 기억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었다. 나는 그 족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떠난 세계와 지난 기억이 낭만적으로 윤색되지 않도록 족쇄가 나를 편치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 보았던 불꽃, 카니발의 날은 여지없이 돌아왔다. 어쩌면 그 아이들도 좋아했을 불꽃, 담장 안 사람들만을 축복하는 불꽃이 성수처럼 쏟아질 시간이었다. 



 그날은 항상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끼어 있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시험공부를 하던 날이면 불꽃놀이를 어디서 볼까, 내일 있을 시험보다 빈번하게 생각했다. 운동장은 흔하고, 옥상은 열렸을까, 아니면 조회대 지붕? 그게 내 내신 성적의 축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집이나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아이들의 미래가 더 밝을 거라는 걸 누군들 몰랐을까. 그래도 여름밤 불꽃 아래 누워 있는 동안은 시험도, 어른이 될 일도 없었다.


 그게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의정부에서 자랐고, 지금도 아주 가끔 친구들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런 날이면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내가 살던 집, 학교, 극장, 시장, 구석구석을 걸어 다닌다. 그리고는 어느 때 그 거리의 추억이 아니라 그 거리를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던 마음에 다시 사로잡힌다. 나는 이 거리에서 얼마만큼 멀리 떨어져 나온 건가. 결국 이 좁은 세계에 갇히게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 멀어져야만, 이 세계를 떨쳐 내야만 내가 바라는 삶에 가까워질 거라 생각했다. 불꽃도 담장도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가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내가 뭔가를 이루었을 때의 모습 또한 이곳과 닿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끝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바람이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글/사진 이주호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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