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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Oct 25. 2016

거대한 팔레트, 테너리

모로코 페즈의 가죽 작업장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 카페 미야 #4


모로코, 페즈 Part II


 코를 킁킁거리며 이상야릇한 냄새, 사실은 그냥 악취를 따라가니 가죽제품 시장이 나온다. 애타게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주인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빼곡히 들어찬 가죽 옷, 가방, 신발 아래 민트 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주인은 내게 한 움큼 쥐어준다. 좁은 계단을 몇 바퀴 돌아 꼭대기에 올라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 거대한 팔레트 모양의 가죽 작업장 ‘테너리(Tennerie)’가 펼쳐진다. 냄새의 진원은 여기였다. 민트 잎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지 않고서는 숨도 쉬기 어렵다.



 페즈의 가죽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품질로 정평이 나있다. 공정은 크게 무두질과 염색 두 단계로 나뉘는데, 동물의 생피를 석회 수조에 며칠 담가 부드럽게 만든 후 물에 깨끗이 씻어낸다. 그 후 나무껍질, 민트, 인디고, 샤프란 꽃과 같은 천연 염료로 물을 들이는데, 이때 염색이 잘 되도록 비둘기, 염소, 소의 배설물을 섞는다. 천 년이 넘도록 이어온 이 작업 방식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전해주며 가업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작업장의 가죽 장인들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를 신고 온종일 수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 가죽도 사람도 알록달록 물들어 있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가죽을 들어 올리고 밟아가며 허리 한 번 펼 새 없다. 고단한 삶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죽은 아기 뺨처럼 보들 거린다. 고된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앞서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맘에 드는 것이 없다. 제품을 샅샅이 살폈지만 가죽이 아까울 만큼 디자인이 엉성하다. 빈손으로 나가는 내게 주인은 싫은 기색도 없다. "신이 함께하기를!" 축복의 인사까지 건넨다.



 몇몇 가게에 들어가 물건의 가격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가격을 알려주는 대신 관심 있을 만한 물품을 죄다 가져와 늘어놓는다. 세일러 문이 옷 갈아입듯 한번 핑그르 돌았을 뿐인데 완벽한 아랍 여인으로 변신해 있는 진기한 경험도 해 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라비아 상인의 상술인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두 손 가득 쇼핑백 달랑거리기 십상이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새초롬한 표정도 없이 신의 축복을 내려주니 가게를 나서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다. 판매에 열을 올리다가도 내게 질문을 퍼부어 댄다. 어디서 왔니, 왜 왔니, 언제 왔니. 그러다 보면 물건 파는 것은 뒷전, 수다를 한참 늘어놓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가방 잃어버린 이야기를 하게 된다. 다들 공항에 아는 사람이 있다며 핸드폰을 꺼내 애꿎은 연락처 리스트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괜찮다고 해도 단호하게 말한다. “무슬림은 어려운 사람 도와야 해요.”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효과가 없다. 매일 미로 속에 몸을 던져가며 길눈이 차차 밝아질 즈음 나는 그곳에서 가방 잃어버린 한국인으로 알려졌고, 사람들의 위로의 눈빛도 은근 즐길 만했다.





 그날도 시장을 쏘다니다 호텔로 돌아왔는데 말쑥한 청년이 문을 열어 주었다. 호텔 주인이라는 ‘시모’라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인사말도 결국 가방 이야기로 귀결되고, 시모 역시도 걱정 말라고, 책임지고 찾아주겠다며 전화 리스트를 오르내렸다. “우리는 나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신께 감사하다고 말해요. 더 힘든 일을 피해가게 하려고 이렇게 한 게 아닐까 싶어요.”

 무신론자인 나에게 시모의 말은 위로보다는, 도대체 무슬림에게 신은 무엇일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코란에서 시작해 기독교과 이슬람교의 차이, 여성의 지위, 테러 등 민감한 사항까지도 질문을 계속 던졌다. 가방 찾기는 급기야 열띤 토론이 되어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시모는 이슬람 율법의 핵심은 바로 자비와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 말한다. “코란을 낱말 그대로 해석해 정치적으로 휘두르는 사람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라, 범죄자일 뿐이에요.”



 다음날 아침, 시모는 말쑥하게 빼 입고 나를 데리러 왔다. 가방을 찾았단다. 정말? 모로코 전국 공항을 수배해 내 가방이 카사블랑카에 있는 것을 찾아내고, 페즈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비행기로 보내기 주기로 했다고 한다. 모로코에서 인맥이란 것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구나. 공항에 도착하니 잘 차려 입은 공항 직원이 직접 나와 게이트 안쪽까지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투성이 가방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덩달아 시모도 와락!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시모에게 대접하기 찾은 Hotel Sahrai의 카페. 모던한 이곳은 천 년 전 미로를 헤매는 내 뒷덜미를 잡고 현재에 툭 떨어뜨려 놓았다. 색에도 맛이 있다면 이럴까. 차가운 모히토 속 모로칸 민트의 새콤함이 손끝까지 초록색으로 물들인다. 내일은 사하라 사막으로 떠난다. 이번에도 신께 감사 인사를 드릴 일이 생길까.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다.





글/사진(1-2, 4-6)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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